1960년대 초 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이 수원 평동에 위치한 선경직물 공장 부지를 둘러보고 있다. <사진 제공=SK네트웍스>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1965년 '원사에서 직물까지' 일괄 생산 체제를 갖춘 선경직물은 어느새 1000여대를 넘는 직기를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최종건, 최종현 회장 형제의 다음 목표는 정유공장을 지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닥쳤다. 1971년 12월 25일 당시 최고층 건물이었던 대연각빌딩에서 큰 불이 난 것이다.

이 빌딩은 선경직물, 선경화섬, 선일섬유, 선산섬유 등 주요 계열사의 서울 사무소가 입주한 선경의 심장부였다.

사고가 터졌을 때 최종건 회장은 일본 출장 중이었다. 당시 경리과장이던 손길승 전 SK 명예회장이 불이 채 꺼지지도 않은 건물로 뛰어 올라가 서류를 챙기려 했으나 현찰과 수표는 모두 타버렸고, 신용장 등 기록장부도 소실되는 등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이후 회사의 상황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거래처들이 대금을 결제하라고 목을 조여왔다. 하지만 최종건 회장은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워커힐 호텔을 인수하는 사업다각화를 시도했다.

1961년 워커힐은 박정희 정부가 국내 주둔한 미군을 관광객으로 유치해 '동양'의 라스베가스를 만든다는 계획으로 건설한 호텔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타임지까지 나서 군사정부가 외화벌이를 위해서 매춘과 도박을 시도한다는 악평을 쏟아내니 적자가 쌓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정부는 1972년 12월 워커힐을 민간기업에 불하한다는 계획을 발표했고 이를 인수키로 한 최종건 회장은 이듬해 자본금 10억으로 선경개발을 설립했다.

이 과정에서 최종현과의 마찰이 발생했다. 최종현은 회사가 어려울 때 업종이 전혀 다른 호텔을 왜 인수하느냐며 강력히 반대했다. 

그럼에도 최종건은 워커힐이 가진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는 여느 호텔과 다르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인수를 추진했다. 선경직물을 설립한 지 20년 되던 해, 사업 다각화라는 큰 목표 때문이었다.

최종건 선경그룹 회장이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사돈 관계여서 권력층의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24억9000만원을 응찰가로 내놓은 극동건설보다 월등히 높은 27억4200만원을 제시하며 유언비어를 불식시켰다.

1970년대 중반 서울 광진구 광장동에 위치한 쉐라톤 워커힐호텔 수영장 풍경 <사진 출처=국가기록원>

1977년 선경은 미국의 쉐라톤과 프랜차이즈 계약을 맺고, 1978년 7월 12일 쉐라톤 워커힐이라는 이름으로 호텔을 재개관했다. 1998년에는 스타우드 그룹이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쉐라톤은 스타우드 그룹 산하가 됐다.

2001년 스타우드 그룹은 계열 브랜드인 W Hotels 도입을 결정하고,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바로 옆에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유명한 W호텔이 개장됐다. 

최종건은 이처럼 죽음 앞에서도 초연히 사업을 진행시켰다. 1973년, 최 회장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됐다. 

정밀 검사를 해보니 위궤양으로 밝혀져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의사가 가슴 X선 촬영을 해보니 오른쪽 폐에 이상 징후가 보였다. 폐암이었다. 암세포는 이미 기관지까지 퍼져 있었다. 

당시 집도의였던 한용철 전 서울대병원장은 조용히 동생 최종현을 불러 말했다.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상태를 호전시킬 시기가 지났다는 뜻이었다. 이에 상심한 최종현, 종관, 종욱 형제들은 맏형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결정, 보스턴의 월리드 육군병원으로 후송시켰다. 기관지가 좀 나빠졌다며 형을 안심시키려 했으나 최종건은 벌써 눈치를 챈 상태였다.

"서울로 돌아 가자…그곳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이 많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대병원으로 다시 입원한 11월 중순, 최종건은 가족들과의 작별의 시간을 가진 뒤에야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장남 최윤원 전 SK케미칼 회장은 미국 유학 중이었고, 차남인 신원도 해병대 복무 중이었다. 막내 창원(SK케미칼 부회장)은 9살 어린아이 선경그룹을 동생 최종현에게 맡긴 채였다. 

눈을 감기 전 최 회장은 선경그룹의 첫 대졸 공채직원이었던 이순석 선경합섬 차장을 불렀다.

"종현이를 도와 꼭 석유사업의 꿈을 이뤄주게."

석유 회사의 꿈도, 사업 다각화의 꿈도 모두 동생 최종현이 짊어지게 됐다. 1973년 11월 15일,그해 최종건의 나이 48세였다. (계속)

최종건 SK그룹 창업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 <사진 제공=SK네트웍스>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진행중)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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