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한  LG인화원에 함께 한 LG신입사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사농공상'의 직업관 탓에 우리 사회에는 반기업 정서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같은 반기업 정서는 정치에 편승해 각종 기업규제를 양산한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이념 갈등이 겹쳐 기업인에 대한 반감이 곧잘 마녀사냥으로 이어질 만큼 심각하다.

최근 EU 집행위원회(EC)와 국제 컨설팅회사 클로브스캔(GlobeScan)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업가에 대한 비호감도가 17%로 미국 4%, 중국 7% 일본 6% 등에 비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총선(2007, 2012)과 대선(2008, 2012) 시기에 급증한 것으로 드러나 정치권이 의도적으로 반기업 정서를 조장한다는 비판도 인다.

◆ 돌격형 이병철과 에둘러 가는 구인회

1960년대 중반 언론들은 대기업 오너에 대한 악의적 보도를 쏟아냈다. 좋지 않은 사건이 발생하면 무조건 오너의 책임으로 몰았다. 회사를 언급할 때도 '락희재벌', '삼성재벌' 등과 같이 상호 뒤에 적개심을 유발하는 용어를 붙여 썼다. 

해방이 되자 매판 자본이라고 비판하더니 4·19 때는 자유당 정권에 결탁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또 5·16 이후에는 과거를 심판한다는 명분 아래 부정축재자로 몰아세웠다.

이에 대해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은 1963년 5월 30일 한국일보에 작심의 칼럼을 발표했다. 한국 사회 빈곤의 원인은 인적자원 결핍에 있으며, 국민은 돈 번 사람을 시기하는 풍조를 버리고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잘사는 길'이라는 이병철의 글이 세상에 나오자 온 사회가 벌통을 쑤셔놓은 것처럼 난리가 났다. 유림의 자손이면서도 평생 상인의 길을 자부해온 연암도 이러한 반발을 이해하기 어려워 지인에게 마음을 털어놨다. 

"잘못하는 기업인은 맞아도 싸다. 그러나 잘하고도 욕을 먹는다면 일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 모든 기업이 다 나쁘다고 싸잡아 비난하면 경제는 누가 하나? 옳고 그름을 가려내고 공정한 보도를 하는 게 언론인데, 무책임하게 비난하면 되나?" 

연암이 전국경제인연합회 4대 부회장을 역임하던 때였다. 연암도 월간지 '경협'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이 중에 '기술입국을 위한 제언'은 오늘날에도 적용해도 무방할 만큼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기계와 공장 대지 같은 것만 생각하고 기술력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한심한 노릇이다. 아무리 시설이 좋고 적합한 원료를 확보해도 기계를 가동하고 능률을 높이는 것은 '사람의 손'이다."

"생산 기업체라면, 창립기의 시설 투자금의 몇 프로와 정상 운영경비의 몇 프로는 반드시 기술대책과 기술향상을 위하여 과감하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 이와 같은 노력은 직접 간접으로 상당히 비용이 들지만 공장의 지체 없는 가동, 제품의 품질보장, 생산보장, 생산능률의 향상 등에서 뚜렷한 효과를 볼 것이라고 확신한다."

구본부 LG그룹 회장이 지난 15일 열린 ‘LG 테크노 콘퍼런스’에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테크노 콘퍼런스는 LG 경영진이 인재들에게 회사의 기술혁신 현황과 트렌드, 선성장 사업 등을 설명하는 자리다. 구 회장은 2012년 제1회 행사를 시작한 이후 6년째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했다. <사진 출처=LG그룹>

경제 성장은 결국 사람이 만든다는 철학이었다. 토막 정보를 모아 국내 최초의 플라스틱과 라디오를 만들어낸 이야기도 담았다. 작은 돌 하나가 큰 파문을 일으키듯 연암의 노하우가 산업계 전반으로 퍼지며 긍정의 효과를 낳았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도 탄력이 붙었다.  

1962년 4000달러 하던 금성의 수출액은 대미 수출 7년 만에 207만2000달러로 500배가 넘게 뛰어오르며 세계인에 '메이드 인 코리아'가 적힌 '골드스타'를 각인시켰다. 이와 함께 1억달러에 불과하던 국내 수출도 10억달러로 올라섰다.

종로 반도호텔에 서울사무소가 있던 시절, 재계를 대표하는 위치가 됐음에도 연암은 호텔이 아닌 동생 태회 집에 머물렀다. 마땅한 식사 자리가 없을 땐 허름한 골목 한식당을 찾았다. 이로 인해 직원들로부터 격이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연암에게는 나름의 신념이 있었다. 어느 날 동대문 근처 미니 합승버스에 그가 올라타니 한 직원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사장님 택시를 이용하지 않고 왜 여기에 오르십니까?" 김주홍 상무였다. 이에 대한 대답이 마치 준비된 연설처럼 걸작이었다.

"나는 합승버스가 좋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고 노랭이니 구두쇠니 부르겠지만 나는 칭찬으로 들립니다. 돈 몇 푼 벌었다고 거들먹거리며 흥청망청 쓰는 사람들 딱해서 못 보겠어요. 돈이야 있을 때 아낄 수 있지 없으면 무엇을 아낀단 말이요. (…) 벌써 다 왔소, 합승버스를 타도 이렇게 잘 오는데 무엇 때문에 돈 뿌리며 택시 탄다는 말이요."

1963년 락희화학에도 노동조합 결성의 바람이 불었다. 노조의 요구안에 대해 연암은 "공존공영(共存共榮)하자는 얘기죠. 누구 말처럼 노동력을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자가 일을 잘하면 회사가 그만큼 이득 볼 거고 회사가 이득을 보면 경영과 노동 양쪽 모두 재미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반목하지 말고 의좋게 갑시다." 하며 분위기 좋게 마무리했다.

"오는 사람은 다 받아들여 각자 한 몫을 하게 해야 한다. 무수한 식구들은 그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금성의 살아 있는 자산이다."

1957년 일찍이 공채를 통해 인재를 중용하던 연암은 '인화단결(人和團結) 상호협조(相互協助)'라는 사시(社是)를 내걸었다. 기업의 성패는 사람에게 달렸다는 인화 정신은 오늘날 LG그룹의 기업문화로 자리 잡았다. (계속)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진행중)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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