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대학 교정. 최종현 회장 학창 시절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조지 스티글러, 밀턴 프리드먼이 교수로 재직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아버지를 이어 이곳 경제학과를 나왔다. <사진 출처=시카고대학>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운명은 미래의 거장을 선택했다. 1962년 10월 자유주의 인문학의 요람 미국 시카고대학에 유학하며 인근 작은 아파트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최종현에게 급전이 날아왔다. "아버지께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위독하시다."

불과 며칠 전 형의 사업이 어려우니 고향으로 돌아와서 도우라는 부친의 절절한 편지 내용이 떠올랐다. 경제학 박사 과정을 미루고 아내 박계희 여사와 두 살 난 아들 태원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그는 형 최종건이 사장으로 있던 선경이라는 직물회사의 부사장에 취임했다. 당시 최종현의 나이 33세였다. 

◆ 잿더미서 선경 일으킨 형제애

선경직물은 창업자인 최종건 사장이 피땀으로 일군 회사였다.

1944년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최종건은 열여덟 살 때 일본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 견습기사로 취직했다. 

비록 1년차였지만 회사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8·15광복 후 무정부상태의 혼란 속에서 치안대를 직접 조직해 공장을 지켜내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선경직물이 생산을 재개한 것은 이듬해 2월, 생산부장으로 승진했으나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선경직물이 정부귀속이 돼 회사를 그만둔다. ‘공무원처럼 평생 월급쟁이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에서였다.

공장을 나온 최종건은 포목상, 석유유통업, 비료판매업 등에 손을 댔다. 하지만 경험 부족으로 잔뜩 손해를 입어야만 했다. 

2년의 시간이 지난 뒤 6·25전쟁이 발발하고 선경공장이 폭격으로 산산히 부숴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젊은 시절 땀이 베인 공장이 처참하게 변한 모습에 가슴이 찢어졌다. 그는 이를 인수해 재건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된 선경직물(왼쪽)과 선경직물 수원공장. 오늘날 SK그룹의 토대가 된 곳이다.

부친에게 사업자금을 부탁했으나 서울대 농대를 다니던 차남 종현의 미국 유학이 임박한 시점이라 그 돈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집안 사정은 힘에 겨웠다. 

종건은 잿더미만 가득한 그곳에서 몇 날 몇일을 숙식하며, 불타버린 기계에서 쓸 만한 부품들을 수습해 직기 4기를 만들어냈다. 

최종현이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형의 이런 모습을 목격했다. 종현은 곧장 아버지에게 달려가 “학업을 포기해도 좋으니 형이 공장을 인수하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종건은 그렇게 공장을 인수할 수 있었다. 동생에 대한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장이 된 종건은 동생의 유학자금을 자신이 마련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최종현은 1954년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화학과 3학년에 편입하고 이후 시카고대학 경제학과를 거치면서 학자의 꿈을 키워갔다.

10여년의 세월 종건은 선경직물에서 한국 최초로 ‘나일론’과 ‘데드론’을 생산해내며 ‘닭표 안감’, ‘봉황새 이불감’ 등으로 국내 시장에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 선견지명의 전략가…선경 부흥의 시대 열다 

1950년대 중후반까지 섬유산업은 전후 복구의 일환으로 미국과 UN으로부터 원재료를 원조받아 자급도를 높이는 구조였다. 1960년에 이르러 완전 자급상태를 넘어 공급이 초과하자 곧바로 수지악화로 이어졌다. 1962년 종현이 귀국할 당시 종업원 임금이 4개월치나 체불될 정도로 사업이 어려워졌다.

귀국 하루만에 부사장이 된 최종현은 우선 시중에 남은 수입달러를 마구 사들이기 시작했다. 미국 정부가 원사 수입 전용 달러를 감액하는 방식으로 원조를 감축할 계획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포화된 내수 시장을 넘어 수출을 해야 한다는 판단도 있었다. 예상대로 1963년 미국 정부는 직물분야 원조를 50% 감축했고 국내에서는 공급부족으로 인한 원사파동이 닥쳤다. 하지만 원사 매입 달러를 충분히 확보한 선경직물은 오히려 차익을 실현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홍콩의 광홍공사에 손해까지 감수하는 협상 끝에 레이온 능직(綾織) 42만6000달러어치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 최초의 인견사 수출이자 수요와 공급문제를 동시에 해결한 탁월한 차익거래의 성공이었다. 

이와 함께 선경직물은 8000만원 상당의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고, 1963년 최종건 회장은 수출 공로로 건국 최초의 금탑산업훈장 수상자가 됐다.

최종현 귀국 1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천재 기업가와 SK의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시작됐다. (계속)

패기와 지성의 쌍두마차로 불렸던 SK 최종건, 최종현 회장. 최종건 회장(맨앞)은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선경을 원사·석유·호텔 사업을 영위하는 대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가장 짧은 생애에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룩한 기업가로 평가 받는다. <사진 제공=SK그룹>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진행중)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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