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유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과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 <사진=국가기록원>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1967년 2월 20일 오후 전라남도 여수시 월내초등학교, 박정희 대통령과 하얀 장갑을 낀 사람들이 단상 위에 올라섰다. 호남정유의 기공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구경꾼들과 내빈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들이 발파 버튼을 누르자 굉음이 퍼져나갔다. 

민간이 석유‧화학 산업을 경영하는 것을 상상도 못했던 시절 '뜬 구름 잡는 소리'라는 비아냥을 딛고 이를 성공시킨 이 날의 주인공은 바로 LG그룹 창업자인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 회장, 고요한 여수 앞바다를 깨운 힘찬 발파음은 1960~70년대 한국 경제부흥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 구씨와 허씨의 깊은 인연

경상남도 진양군 지수면 방어산(防禦山)을 끼고 서에서 동으로 잔잔하게 흐르는 작은 강이 있다. 지리산으로부터 발원한 염창강이다. 이 강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마을이 구인회 회장의 고향인 승산(勝山)이다. 연암은 1907년 8월 27일 독립운동가 구재서(具再書)공과 하양진 여사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암은 구인회 회장의 호이고 아명은 정득이다. 

만석꾼이 두 집, 천석꾼이 십여 가구나 되는 이 마을에 먼저 자리 잡은 것은 임진공신 관란 허국주(許國柱)의 후손인 김해 허씨 가문이었는데 능성 구씨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은 연암의 8대조가 허씨네로 장가를 들면서부터다.

이후로 구씨와 허씨는 대대로 사돈을 맺었는데, 연암도 옆집에 살던 허만식(許萬寔)공의 장녀 을수(乙壽)양과 결혼을 했으니, 두 가문의 깊은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연암의 집안은 조선조 중앙관청 홍문관 교리를 지낸 조부 구연호(具然鎬)로 인해 구교리댁으로 통했다. 

일찍이 가장이 된 연암은 처가댁의 후원으로 지수초등학교를 거쳐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학교독서회에도 가입하며 공부에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1926년 장인 어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지원금이 끊겨 학업을 중단하고 만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말라”고 미안하다는 아내를 위로했으나 그의 나이 열여섯, 학교 중퇴는 큰 상처였다. 때 맞춰 장남 구자경(具滋暻)까지 태어났으니 미래에 대한 막막함은 떨칠 수 없었다.  

연암의 고향 승산마을 전경. 가운데 보이는 것이 지수초등학교다.

◆ 전환의 시대, 무라까미에게 배운 상술

낙향한 연암의 눈에 띈 것은 조선인 행세를 하며 일용잡화를 파는 일본인 무라까미였다. 처음에는 눈깔사탕이나 팔고 다니던 빈털터리가 연필, 성양, 양초를 거쳐 어느새 생활필수품인 석유를 취급하는 마을의 독점적 잡화상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양반은 가난해지고 있는데, 부지런함과 상술로 무장한 일본인은 부자가 되어 갔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시대가 저무는 때였다.     

1928년 1월 16일 동아일보의 지수협동조합 창립 기사. 우측 두 번째 열에 연암의 이름이 보인다.

연암은 무라까미를 벤치마킹하며 자신이 몸담고 있던 청년조직 장근회(槳勤會)를 설득해 소비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마을소비자들이 협동하여 무라까미 상점에서 사는 가격보다 싼 값에 공동구매해 이익을 얻는 운동이었다.

1929년 이사장으로 선출된 그는 전국의 큰 도시를 돌아다니며 각종 일용 잡화를 사모아 협동조합 구판장에서 진열해 팔았다. 3년의 시간, 조그맣게 시작한 조합은 광목과 비단을 다룰 정도로 성장했다.  

또한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이 되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히고 시대 상황에 따른 정세 변화를 읽는 안목을 키웠다. 장사에도 자신감이 생겼고 당시 진주에서 꽤 잘나간다는 포목점 천종상회를 방문해 창업에 관한 정보도 얻었다. 상업을 천시하는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나 더 넓은 곳으로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그는 이미 다섯 동생의 맏형이자 3남1녀의 아버지였다. 

◆ 돈벌이 나선 유림의 자손포목상 '구인회상점' 탄생

"할아버지, 밖으로 나가 장사를 해볼까 합니다."

연암의 기습 선언에 구교리는 만감이 교차했다. '나라 잃은 수모와 3.1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거세어진 일제의 유림 탄압도 모자라, 학자라도 되길 원한 맏손자가 돈벌이를 위해 장삿길로 나선다니…'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상점 하나 여는데 5천환이 필요했던 때, 결국 연암은 조부의 후원은 포기하고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녔다. "구인회가 돈을 꾸러 다닌다며?" 마을에 소문까지 자자하게 났으니 누가 빌려주겠는가. 

다행히 어느 날, 아버지 구재서가 연암을 남몰래 부르더니 2천환의 돈뭉치를 내놓았다. "2천이다. 내 힘으로는 지금 이것밖에 못 준다. 세상 얕보지 말고, 신용 얻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 구멍가게 하나 내기 어려운 금액이었지만 큰 집 양자로 간 친동생 철회(哲會)와 동업을 이야기한 터였다. 

한 손에 잡히는 돈을 꾹 거머쥔 25세의 청년은 마음으로 다짐했다. '아버지! 꼭 성공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어렵사리 3800환을 확보한 연암과 철회는 1931년 7월 진주의 번화가 식산은행 근처에 ‘구인회상점’을 차린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가게의 경영은 결코 쉽지 않았다. (계속)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진행중)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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