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인용됐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8인 전원 일치된 의견으로 파면을 선고하면서 정치든 경제든 존경받는 리더십만이 영속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줬다. 

격랑으로 빠져드는 정국 가운데 한국 경제가 마주한 현실도 녹록지 않다. 올해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설비투자 증가율이 마이너스 2.4%를 기록했다. 이는 2009년 이후 7년 만에 최저치로 지난 5년 평균성장률은 2.8%로 둔화되고 잠재성장률도 추락 일로다. 

대기업 매출액 증가율은 3년 연속 마이너스 행진 중이다. 공식 실업자는 100만명 돌파로 통계 이래 사상 최다를 기록했고 취업준비생이나 구직단념자를 포함한 청년실업률은 33% 수준이다. 450만명의 청년경제활동인구 중에 150만명이 일자리가 없는 셈이다.

OECD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 성장률은 2.7%로 회원국 중 10위에 그쳤다. 1인당 GDP가 3만 달러가 되기 전에 성장판이 닫혀버리는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크다. 

물론 지난 100여년 동안 중진국 가운데 선진국으로 진입한 나라는 일본과 아일랜드밖에 없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중진국 탈출은 실제로 어렵다.

하지만 한국은 개발도상국가들 중 가장 성공한 모델로 꼽혀 왔다. 여기서 한발만 더 도약하면 정말 선진국이 된다.

혹자는 시장경제의 한계에서 이유를 찾지만 성숙의 단계로 접어든 기업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구인회 창업회장은 1970년대 성장의 시대를 맞기 전에 LG그룹을 성숙의 반석 위에 올렸다. 

1970년대 중반 여의도 한국증권거래소 전경 <사진 제공=국가기록원>

"한국경제가 꽤 성장했제?" 1969년 초 연암은 기획조정실 허준구 실장에게 주식공개 계획안 작성을 지시했다. 정부의 주식공개 권고가 있던 차였다. 

하지만 일반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회사를 팔아먹는 행위라고 여겨 주위의 반대가 심했다. 그럼에도 자기 생각을 강제할 마음이 없었다. 연암은 임원회의를 열어 여러 의견을 들었다. 주식공개의 필요성을 수차례 조목조목 설명했다. 그리고는 마지막 회의에서는 언성을 높였다. 

"명색이 우리가 재벌 아니오?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으면 안 됩니다. 회사 팔아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많이 키우고 많이 벌어서 사람들과 나눠 먹는다는 것이 어째 나빠요?" 

반대자들은 그렇다면 자회사부터 시작하자고 했지만 연암은 "쩨쩨하게 하지 말고 모체인 럭키화학부터 하자!"고 결론 내렸다. 하지는 이는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장남 구자경 회장은 럭키화학 시절 수년 동안 공장에서 밤낮을 보낸 사람이다. 새벽엔 상인들에게 제품을 나눠주고, 종일 일하고도 밤이면 숙직하기가 일쑤였다.

아들의 불만을 전해들은 연암은 "회사를 아는 사람이 숙직을 해야 회사가 크는 법이다. 대장장이는 호미 한 자루를 만드는 데도 수없는 담금질을 통해 무쇠를 단련한다"며 "내 아들이 귀하니까 저렇게 일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너무하다 칭찬 한 마디 없었던 매정한 아버지였다.

LG그룹 2대 회장인 구자경 명예회장과 3대 회장인 구본무 회장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사진 제공=LG그룹>

1969년 6월 3일, 호남정유의 성대한 준공식를 치른 뒤 연암 내외는 배를 타고 여수 앞바다로 나왔다. 기분이 좋은 연암은 부인에게 약속했다.

"그동안 고생 많이 시켰는데, 이젠 걱정 마소. 난 팔십까지 살 작정이오. 자신 있소. 임자도 그렇게 살겠지요? 그렇게 살면서 세상 구경 원없이 다 시켜주겠소."

그해 찌는 듯이 더웠던 여름이 왔다. 머리에 통증이 느껴져 부인과 함께 며칠 부산으로 내려가 쉬기로 했다. 그러나 통증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던 어느 날,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구토 증세를 보였다. 주치의 권유로 일본으로 건너가 정밀검사를 받았지만 의사는 병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박승찬 부사장이 식구들을 대신해 의사에게 물었더니 뇌관종양이었다.

당시 뇌관종양은 치료가 어려운 병이었다. 병원의 권유로 원서동 집으로 돌아왔지만 병세는 어쩔 수 없었다. 모두가 체념의 시간이 왔음을 느꼈다. 

연암은 자경을 불러 "너 나를 많이 원망했제. 기업을 하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에 공장일을 모두 맡긴 게다. 그게 밑천이다. 자신 있게 기업을 키워나가라"는 말을 남긴다.

"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좀 쉴 걸 그랬제. 너무 일만 했다…."

함박눈이 온 세상을 뒤덮는 밤이었다. 종로구 원서동에 자리잡은 저택 침실에 항암치료 중 의식을 잃은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연장하고 있었다. 

병상 앞 자명종의 분침은 자정을 넘겨 12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24시간만 지나면 대망의 1970년대가 밝아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숨소리는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이를 지켜보던 장남 자경과 부인 허씨가 오열했다. 연암의 숨소리는 차분하게 내려앉았고 펑펑 쏟아지는 하얀 눈은 온 세상을 뒤덮었다.

향년 63세, 완숙한 인생의 정점, 떠나기엔 너무나도 아쉬운 나이였다. 60평생 경제 부흥의 기틀을 만든 선지자가 70년대 결실을 못 보고 영면했다. 그해 10월 락희화학공업사는 민간기업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이름을 올렸다. 

3대로 영속하는 LG그룹. 1995년 2월 22일 구자경 명예회장과 구본무 회장이 이취임식을 갖고 있다. <사진 제공=LG그룹>

"돈을 버는 것이 기업의 속성이라 하지만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듯, 기업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복리를 먼저 생각하고 나아가서는 나라의 백년대계에 보탬이 되는 것이어야 하는 기라.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기업을 일으킴과 동시에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런 기업만이 영속적으로 대성할 수 있는 기라."

연암이 떠난 6일 후인 1960년 1월 6일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 회장이 화학, 전기, 전자, 정유, 전선, 무역, 통신 등 11개 기업군을 이끄는 선장 자리에 올랐다. 존경받는 기업으로 영속하라는 연암의 뜻은 올해로 창립 70주년을 맞는 화담(和談) 구본무(具本茂) 회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구본무 회장은 정유년 신년사를 통해 양적인 성장을 넘어선 가치를 중심으로 존경 받는 기업이 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끝)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마지막)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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