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전쟁에 관한 오랜 미신이 존재한다. 무언가를 파괴해 다시 만들면 경제성장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이다. 대규모 재정지출이 총수요를 자극해 일자리를 늘린다는 오해도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효과에 불과하다.

프레데릭 바스티야(Frederic Bastiat)는 이를 '깨진 유리창의 오류'라고 지적했다. 전쟁과 상관없이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상품은 언제든 탄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마술처럼 시작한 플라스틱 시대

북한 공산군이 한강 이북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서울 장충동 화장품연구소로 보낸 장남 자경, 경기중학생인 자두, 대학에 다니는 넷째 동생 평회와 막내 두회에 대한 걱정이 밀려왔다. 

연암의 곁에는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락희화학의 전무로 입사한 셋째 동생 태회가 있었다. 태회는 럭키크림이 투명한 색의 일제 '메이쇼쿠크림'에 밀리던 때 화장품연구에 몰입하여 '투명크림'의 개발 성공을 이끈 인재였다.   

"형님 여기가 집이고, 여기에 공장이 있습니다. 공산군은 부산까지 오지 못합니다. 우리는 어제처럼 크림을 만들어 팔면서 전쟁이 끝나는 걸 기다려야 합니다." 

태회의 조언를 받들어 크림 생산을 계속하던 어느날 대리점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크림통 뚜껑이 절반 이상 깨지고 크림이 쏟아져 도저히 팔 수가 없다는 항의였다. '다른 대리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대로는 크림 판매를 계속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선 연암은 생산을 잠정 중단하고 전 재산을 투입해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뚜껑' 개발에 돌입키로 했다. 

전쟁 때문에 시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무리한 투자는 위험하다는 윤욱현(尹煜鉉) 기획실장의 만류에도 "사업이란 당장 눈앞의 이익이 아닌 미래를 내다보고 해야 한다"는 뜻을 확고히 하며 부산의 시장과 서점을 샅샅이 뒤져 플라스틱 관련 자료를 모았다.

한국전쟁 당시 부산 국제시장의 전경. 미군 참전 용사 케네스 레어(Kenneth Lehr)씨가 촬영한 사진이다.

이 무렵 삼성물산의 이병철(李秉喆) 회장이 연암을 찾아와 동업을 제안했다. 제일제당 설립 3년 전, 호암은 연암에게 원당(原糖) 수입을 공동으로 해보자고 제의했다. 물자 부족으로 설탕 가격이 수십배로 폭등하던 때라 큰 수익을 볼 수 있는 사업이었다. 

'머지않아 플라스틱 사출기가 부산 부두에 도착하는데…' 일확천금이 가능한 호암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연암의 머릿속엔 전 재산 3억원을 투입한 기계를 빨리 가동시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찾아온 1952년 9월 중순, 범일동의 허름한 아파트 구석에 놓인 미국산 인젝션머신이 낯선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전부를 건 두 번째 모험 앞에 모두가 숙연해지자 "와 빗이다! 빗!" 하며 플라스틱 빗이 마술처럼 쏟아졌다. 

맨몸으로 피란은 왔어도 머리는 빗어야 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오리엔탈(ORIENTAL)'이라는 상표가 붙여진 이 빗을 보자 장사꾼들은 마구 달려들었다. 투입 원가의 20~30배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플라스틱 제품을 밀수에 의존해야 했던 1950년대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 야윈 럭키의 도전, 밀려나는 콜게이트 치약

1960년대 락희화학공업사의 한 종업원이 부산 연지동 공장에서 치약을 생산하고 있다. <사진 출처=국가기록원>

연암은 사업의 중심을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으로 전환키로 하고 부산 범일동과 부전동에 합성수지공장을 세웠다.

이어 1953년 11월에는 락희산업주식회사를 설립하는 한편, 1954년 비닐시트를 생산해 본격적인 비닐하우스 시대를 열었다.

동시에 독일 스웨브홀사(Schweb Hall)로부터 충전기와 튜브제조기를 도입해 치약 생산에도 도전했다.

"이런 것을 누가 삽니까? 미제 아니면 안 삽니다. 누가 알아나 주나요." 

당시 치약 시장은 미국의 콜게이트사가 독점하고 있었다. 반응이 좋지 않은 상인들에게 미국에서 들여온 원료를 서독에서 가져온 기계에 넣고 똑같이 빼낸 거라고 열심히 설명해도 아무도 이해하지 않았다. 연암은 인내하며 치약 품질 향상에 만전을 기울였다. 

"그거 괜찮더라, 콜게이트와 다를 바 없어." 

시간이 차츰 흐르니 결국 예상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국산 치약이 지배하던 시장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는 일성이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둑은 거침이 없었다.

럭키치약을 선두로 내세운 락희화학은 1955년 자본금 기준 국내 4위의 기업으로 올라설 정도로 급성장하며 1957년 국내 1위의 시장점유율을 달성했다. 

이후 락희화학은 반도상사(半島商社)로 이름을 바꿔 무역 상사 체계를 갖추어 가며 1957년부터는 비닐장판·폴리에텔렌 필름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의 화학 업체로 올라섰다. (계속)

중국 항저우에서 열린 'K-뷰티쇼 인 차이나' 행사(2015년 9월) 크림을 생산하던 락희화학공업사는 LG생활건강으로 다시 태어나 세계로 나아 가고 있다. <사진 제공=LG생활건강>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진행중)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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