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1950년대 고령교 공사가 악몽이었다면, 아산에게 시멘트 공장 건설은 현실적 장애였다. 이미 망했다는 세간의 평가를 받던 현대건설은 1957년 한강 인도교 복구공사로 재기에 성공한다. 신용을 무기로 쟁쟁한 경쟁 회사들을 제치고 낙찰 업체로 선정됐다. 

한편 전후 복구 사업으로 건설 물량은 늘어나는데 국내에서 생산되는 시멘트는 20여만톤에 머물렀다. 반면 수요는 45만톤이 넘어 공사비만 하염없이 늘었다.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점토·철광석은 강원도와 충청도에 가면 얼마든지 있던 때였다.

◆ 건설 왕의 발목을 잡았던 시멘트

아산에게 시멘트 공장은 절실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는가?'  

급기야 미국 유학 중이던 셋째 동생 정세영(鄭世永)을 회사로 부른다. 부장으로 입사한 세영이 수요 예측을 실시한 결과 5년이 경과하면 120만톤의 시멘트가 필요하다는 전망치가 나왔다. 400페이지가 넘는 입증자료를 부흥부(復興部)에 제시했으나 어렵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1958년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줄이는 한편, 개념을 무상에서 유상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 도입된 것이 개발차관기금(DLF)이었는데, 그 기관에서 예상 수요가 75만톤에 불과하다는 용역 보고서를 발표했다. 전후 원조금은 소비재 수입에 사용하는 게 원칙이라 이승만 정부도 일종의 시위 격으로 문경 시멘트공장을 건설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1959년 정주영이 동생 신영에게 보낸 육필 편지 <사진=관훈클럽신영연구기금>

"ICA 자금 확보 계획은 실패하고 금년도 다시 DLF 자금으로 추진 중이다. 부흥, 상공, 재무 다 시멘트공장 설치에 힘쓰고 있으므로 미국 정부만의 이해만이 남아 있다." - 넷째 동생 정신영에게 보낸 편지 중

하지만 세상은 냉정했다. 힘들게 따낸 DFL은 이양구(李洋球)의 동양시멘트가 차지해 확장을 도모했다. 1947년 북에서 혈혈단신으로 월남해 부산 국제시장에서 ‘설탕왕’이라는 이름을 떨치던 그는 2년 전 이미 삼척시멘트를 인수해 사업에 진출한 상태였다.

"DLF의 조사결과가 옳더라도 지금의 시멘트공장 갖고는 어림도 없으니 무조건 시멘트공장 건설을 추진하라"는 맏형의 단호한 의지에 세영은 강원, 충청 석회지대를 뛰어다니며 질 좋은 석회석과, 부지를 물색했다. 수십 차례의 현장 조사 끝에 1958년 10월, 충북 단양군에 위치한 매장량 8200만톤의 광산을 매입했다.  

◆ 수출주도 경제로의 패러다임 전환

4·19 혁명으로 들어선 장면(張勉) 정부의 최대 고민은 부정축재자로 몰린 기업인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3년이던 기존의 경제개발 계획을 5개년(1962∼66년)으로 수정 보완하고, 차관 확보를 위해 유럽 파견단까지 구성한 상황에서 '경제를 죽일지도 모르는 모험'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다.

외국 정부와 투자자들에게 한국은 전쟁 재발의 위험부터 따져야 하는 불안정한 신생국에 지나지 않아 민간 투자는커녕 정부주도의 협상도 어려운 현실이었다.

기업인들은 동분서주하며 1961년 1월 10일 삼양사 김연수(金秊洙) 회장을 중심으로 한국경제인협의회(1968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를 창립해 경제 발전 전략을 정부에 제안했다. 

이병철(李秉喆)과 이원만(李源万)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냈다. 외자 도입을 통한 수출주도형 경제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탄생한 정부-기업의 발전적 네트워킹을 통한 빈곤 탈출의 대장정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정변과 함께 시작된 제3공화국으로까지 이어졌다.

1963년 한국경제인협회 정기 총회 <사진=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

◆ 남들이 안 된다고 할 때… 항상 되는 까닭을 연구

1963년 말이 되자 아산의 예상대로 기존의 추정치보다 오히려 많은 130만톤의 시멘트가 필요하게 됐다. 1961년 12.9%이던 수입 시멘트의 비율은 26.3%로 치솟았다. 아산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지 못하고 걸어서는 황하를 건널 수 없다"는 시경(詩經)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 고령교 공사가 장비 부족으로 인해 뼈아팠던 만큼 안정적인 시멘트 확보를 제1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시멘트 생산을 1964년까지 172만톤으로 늘리기로 결정하고 현대건설의 사업을 허가한다. 공기를 6개월 남겨두고 완공된 단양 시멘트공장은 연산(年産) 20만톤의 업계에서 가장 작은 규모였지만 제일 높은 생산 실적을 기록했다. 그곳에서 '호랑이표 시멘트'가 쏟아져 나왔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정주영의 3·1운동”이라고 회자되며, 한층 북돋워진 사내 활기는 태국의 고속도로 공사 성공에 이어 해외 건설 신화로 이어졌다. 

시멘트 일화에서 주목되는 정주영의 기업가 정신은 기회 포착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 끈기다. 그에게 공사뿐만 아니라 사업 자체가 포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현실적인 난관을 인정하면서도 끝내 행동으로 돌파해냈다.

혁명이라 불렸던 정치 급변 속에서 부정축재자로 몰린 기업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에 부역해 재산을 불렀느냐는 비난에도 기업인에게는 죄가 없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이미 떨어진 벌과금을 물지 않는 대신 기간 산업에 투자해 주식으로 대납하겠다며 오히려 적극적인 성장 의지를 보였다. 정부도 경쟁에서 이긴 기업에는 충분한 보상과 격려로 보답했다.

기업가들은 남들이 안 되는 이유를 고민할 때, 항상 되는 까닭을 연구한다. 현실적 반대를 수용하면서도 벽을 넘어서는 방법을 찾으려고 애쓴다. 결국 일이 끝나고 나서야 사람들은 알아 차린다. 그래서 "거봐 내가 뭐랬어"가 자주하는 말이 된다. 한강의 기적으로 상징되는 정경 협력의 시대는 이렇게 열렸다. (계속)

1964년 9월 15일 단양 시멘트공장 시업식에 참석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주영이 소개하는 '호랑이표 시멘트'를 박정희 전 대통령이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사진=현대시멘트>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진행중)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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