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1947년 트랜지스터 개발의 주역인 존 바딘, 윌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 <사진 출처=미국 벨연구소>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1947년 12월 23일 미국 뉴저지의 벨연구소(Bell Laboratory), 손톱만 한 게르마늄 조각 하나를 놓고 연구진들이 일제히 "유레카"를 외쳤다. 인류 최초의 반도체 트랜지스터의 증폭 기능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크기도 진공관과 비교하면 220분의 1로 작을 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에 에너지 효율성을 갖춘 이 물체는 세계를 휩쓸며 20세기 정보 혁명을 주도했다. 

◆ 우리도 라디오 한 번 만들어보자!

1962년 금성사 라디오 제조공장 <사진 제공=LG그룹>

트랜지스터가 진공관 라디오를 대체하던 1959년, 부품 생산업체는 물론 라디오 조립공장 하나 없던 한국에서 연암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찍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라디오 생산에 도전했다. 피엑스를 통해 일제와 미제 라디오가 물밀 듯이 들어오는 시장 상황이었다. 

'겉은 플라스틱으로 만들면 되지만 복잡한 내부를 배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생겼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시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면 장래는 밝다는 럭키치약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었다. 

연암은 당장 윤욱현 상무를 대동해 구미 공업선진국 순방에 나섰다. 그는 두어 달간 이어진 현지 산업 시찰을 통해 기술 문명의 중요성을 절감하면서 귀국 후 1958년 10월 금성사(金星社)를 설립했다.

이듬해 6월 부산 연지동 공장에서 일본 산요전기의 진공관식 5구 라디오를 샘플로 한국 최초의 라디오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물론 스피커와 진공관 등의 핵심 부품은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0개월간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은 끝에 한국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탄생했다.  

1959년 11월 4일, 마침내 A-501의 출시를 예고하는 기사가 부산 국제신보에 실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산 라디오가 드디어 쇼윈도에 나타나게 된다. 그동안 라디오 생산에 필요한 제반시설을 갖춰오던 금성사는 마침내 다량생산단계에 들어갔으며, 오는 11월 15일경부터 전국 상점에 일제히 공급하게 되었다…."

감격스러운 소식에도 불구하고 미도파백화점에 진열된 이 라디오에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외제가 아니면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지배하던 시대였으나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날로 쌓여가는 적자에 직원들이 동요했다. 하지만 연암은 태연했다.

"인공위성이 어디 하루아침에 되었겠소? 꾸준히 해보소. 쳐다봐줄 때가 올 것이오." 금성사는 A-401, B-401 등 여러 모델의 라디오를 연속 출시했다. 라디오 기술을 응용해 이듬해 1월엔 국내 최초로 선풍기와 전화기, 콘센트, 플러그, 소켓 등 전기 배선기구까지 생산했다. 그러나 한국산 전기 제품을 처음으로 맞이한 시장은 싸늘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일부 좌익의 과격한 통일운동이 전개됐다. 이 혼란을 틈타 북한 정권은 남북연방제 시행과 남북협상을 제의, 적화통일 전술에 불을 지폈다. 이때 5·16 정변이 일어났고 들썩이던 세상이 하루아침에 조용해졌다. 

군사 정권은 적극적인 반공 태세 확립, 부패·구악 일소와 함께 국가 자립경제 재건과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18명의 기업인을 부정축재자로 구속하고 51억원 상당의 환수를 통보했다. 불행히도 연암의 동생 평회가 부정축재 혐의로 잡혀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 미‧일 양국 주도하던 트랜지스터 혁명 동참 

1961년 국내 최초 국산화 한 자동전화기로 시험통화하고 있는 구인회 LG 창업회장 <사진 제공=LG그룹>

한편 5.16과 함께 금성사도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새로운 정책 홍보를위해 박정희 정부가 '농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이에 따라 1960년 몇 천대에 불과하던 판매고가 1962년에는 13만7000대로 급증했다. 라디오뿐 아니라 전화기 판매도 순조로워 매출액이 4억3100만원으로 전년대비 23% 증가했다. 

여기에 고무된 연암은 미국과 일본이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트랜지스터라디오 시장 추격에 나섰다.

당시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일본의 동경통신공업(SONY의 전신)이 출시한 TR-55의 등장과 함께 미‧일 양국의 자존심 대결로 치달았던 품목으로 오늘로 치면 아마존과 오라클이 각축하는 글로벌 클라우드 시장에 한국의 스타트업이 이기겠다고 끼어든 격이었다. 

핵심 부품을 수입해야 하는 관계로 가격 경쟁력은 장담할 수 없었으나 연암은 강행으로 밀었다. 마침내 1962년 11월 T-703라디오 32대와 TP-608라디오 30대를 미국에 수출하는 날까지 왔다. 얼핏 초라해 보이는 62대의 수출이지만 연암으로서는 너무나도 큰 성취였다. 전자‧전기를 이용한 제품은 무엇이든 금성사에서 만들어 따라 잡겠다는 목표를 이룬 것이었다.

"우리 금성사 라디오가 드디어 해외 시장에서 먹히고 있습니다." 

허준구 상무의 보고에 연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잘되었다. 선풍기, 라디오도 거래해보고 텔레비전을 만들면 그것 가지고도 한번 붙어보자." 신문들은 금성사의 라디오 수출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국민들은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1962년 4월 서독 푸어마이스터사와 차관계약 체결 후 담소를 나누는 구인회 회장 <사진 제공=LG그룹>

한편 이 무렵 연암은 한국경제인연합회 20인 회장단에 가입하고, 서독 후어마이스타사에서 들여온 차관과 내자를 이용해 한국케이블공업(현 LS전선)을 설립했다. 

금성사 창립으로부터 10년 뒤인 1968년, 전자‧전기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한 박정희 대통령은 관련 진흥법을 발효하고 성장 전략을 모색했다.

이병철 삼성물산 회장이 "전자산업이야말로 기술, 노동력, 부가가치, 내수와 수출 전망 등 모든 면에서 우리나라 경제에 알맞은 산업"이라며 본격적인 전자산업 진출을 타진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계속)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진행중)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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