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1970년대 현대는 건설, 교통, 자동차, 조선, 발전, 기계, 시멘트와 함께 급속도로 성장해 세계 굴지의 기업으로 올라섰다. 금융, 반도체, 물류, 경제연구, 엘리베이터 분야로의 사업 다각화도 활발히 진행했다. 1977년 현대증권, 1983년 현대전자산업, 1984년 현대엘리베이터, 1986년 현대경제연구원, 1988년에는 현대택배가 태어났다. 

현대자동차는 세계로 질주해 글로벌 5대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조선에 이어 해양플랜트, 엔진기계, 로봇, 전기전자시스템, 그린에너지 산업으로 진출한 현대중공업은 전 세계의 거친 바람과 조류, 파도를 이겨내며 기록적인 생산품을 쏟아내고 있다.

한번 가난에 빠진 나라는 경제발전의 요소의 한계 때문에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 경제학계의 일반적 인식이다. 올해 1월 전미경제학회에서도 4차 혁명에 따른 후발국의 뒤쳐짐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스위스 USB은행도 고도의 연결성과 융복합으로부터 신흥국이 이익을 얻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정책 입안자들은 1960~70년대를 '압축성장기', 1980년대를 '경제안정기' 등으로 구분하지만 기업가는 생각을 달리한다. 언제나 주어진 한계를 넘기 위한 전략적 제휴, 경영 합리화, 인수·합병 등과 같은 결단의 문제에 직면한다. 현상 유지를 넘어 경쟁에서 살아 남아야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의 성장 의지가 정경 협력으로 이어져 개발 시대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경제적 자유만이 성장을 가능케 한다. 기업 자유와 경제는 함께 진화한다.

후진국과 선진국의 결정적인 차이는 이 같은 기업가들의 의사 결정이 자유롭게 발휘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2012년까지 마(魔)의 5%라던 경제 성장률 예상치가 어느새 3%의 벽을 말하고 있다. 내년이면 현재의 2%를 두고 벽이라고 할지 모른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사회주의 체제 몰락과 함께 쏟아져 나온 동유럽 신흥국들을 시장의 기회로 삼았고, SK 최종현 회장은 외환위기 이전부터 '세계화'의 가치를 알리며 대비를 강조했다. 누구보다 앞서 나가는 특성 때문에 기업가란 '진화의 과정 속에서 새롭게 나타난 인간의 유전자'라는 해석도 나온다.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는 "참기업가 정신은 머리가 아닌, 타고난 천성과 실천하는 능력에서 나온다"며 아산을 극찬했다.

◆ 옥죄어진 경제 자유기업통폐합과 창원공장 강탈

국보위의 산업 일원화 조치를 소개한 동아일보(1980. 08. 20). 이후 창원공장을 인수한 김우중 사장도 100일 만에 손을 들어 한국중공업으로 공사(公社)화되고, IMF를 거치며 부실을 이기지 못해 두산그룹이 인수했다.

1980년, 정부는 기업통폐합이란 이름으로 공기업화 정책을 추진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들어선 신군부의 임시행정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중화학공업 난립을 재편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발전설비 일원화 조치를 단행했다. 

현대에도 예상치 못했던 비극이 일어났다. 아산과 한라의 정인영이 운명을 걸고 추진하던 현대양행 창원기계종합공장이 대우로 넘어간 것이다. 1979년의 겨울의 어느 날, 국보위는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이명박 현대건설 사장, 정세영 현대자동차 사장 세 사람을 공관으로 소환했다.

새한자동차의 김우중 회장도 그곳에 불려와 있었다. 관계자는 이들을 각 방에 두고 발전설비와 자동차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했다. 경제계 선배로서 아산에게 우선권을 주었으나 둘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만 하는 강탈이나 다름없는 협박이었다. 

단순한 조정 시책이 아니었다. 자동차와 발전설비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한 기업이 투자한 돈과 노력, 자유시장경제의 법과 경쟁을 송두리째 무시하는 시도였다. 수력·화력·원자력 발전용 설비와 더불어 제철·석유화학·시멘트·해수담수화 사업까지 총망라하는 대역사의 꿈이 하루아침에 좌초를 맞았다. 산업합리화라는 미명으로 벌어진 당시의 불합리한 조치는 조선, 해운업에까지 그 후유증이 이어지고 있다.    

◆ 고향 땅을 찾아…통일에 대한 열망

아산에게 북한에 두고 온 고향땅 통천은 배고픔과 방황의 추억이 깃든,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고향을 떠나 그는 세계적인 기업인이 되었지만, 늘 굶주림에 헐벗고 있는 북한 동포의 실상을 보고 가슴 아파했다. 특히 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이란 이름으로 자행된 김정일 정권의 폭정하에서 300만 동포가 굶어죽는다는 보도를 보면서, 북한 동포를 도와야겠다는 열망은 더욱 강해졌다. 공장을 만들 때 말뚝을 손수 박았던 그는 북한에다 시장경제의 말뚝을 박기로 결심했다. 

1989년 1월, 아산은 개인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해 '금강산남북공동개발의정서' 체결이라는 모험을 감행한다. 낙후된 북한지역을 개발해줌으로써 한국경제에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를 이어받은 그의 5남 정몽헌(鄭夢憲) 회장은 9년 뒤인 1998년 6월 금강산관광사업계약을 체결하고, 11월 18일 관광선 금강호(金剛號)를 첫 출항시켰다. 개성과 금강산 관광과 사업을 전담하는 현대아산도 창립됐다. 2007년까지 금강산을 다녀간 관광객은 195만 명을 돌파했다.  

아산은 1998년과 2000년, 각각 500마리와 501마리의 '통일소'를 몰고 휴전선을 넘어가며 북한의 닫힌 문을 열고자 했다. 그러나 필생의 노력으로 성사시켰던 금강산 관광은 북한 정권의 대남 심리공작의 도구로 이용되다, 2008년 7월 관광객 박왕자씨 피격 사망 사건과 함께 중단되고 말았다.  

아산은 한때 정치에 참여하는 외도를 했다. 1992년 김동길(金東吉) 교수 등과 함께 통일국민당(統一國民黨)을 창당한 것이다. 통일국민당은 총선에서 원내에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여세를 몰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하지만 정치의 벽은 높았다. 그 해 12월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388만 67표(16.1%)를 얻어 김영삼, 김대중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쳤다. 

방북 이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된 아산은 2001년 5남 정몽헌에게 현대아산을 물려주고, 같은 해 3월 21일 86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안타깝게 정몽헌 회장도 김대중 정부 당시 5억 달러 대북비밀송금사건과 관련된 수사를 받던 2003년 8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어 아산의 통일에 대한 열망과 정치 도전은 막을 내린다. (계속)

1998년 6월 19일 정몽구, 정몽헌 회장이 북한 고성군 통천면 아산리에 위치한 정주영 명예회장의 생가를 방문해 북측의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사진 제공=현대그룹>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진행중)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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