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제17회 전경련 총회에서 행사 진행을 하고 있다. <사진=전국경제인연합회>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아산은 격랑 속 국제무대에서 크게 활약한 탁월한 승부사이자 애국자였다. 그가 제13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으로 피선된 1977년 2월, 주한 미군 철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지미 카터 후보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미국의 핵우산 보호가 상실될 것을 우려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체 핵무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을 도모했다. 카터는 인권을 강조하는 등 박대통령을 압박하면서 주한 미군 철수를 강행하려고 했다. 

한·미 양국에 긴장이 고조됐다. 한국으로서는 서부전선에 주둔하는 미군이 철수한다면 방위공백으로 6·25의 비극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증폭됐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주한 미군의 철수는 곧 북한의 오판을 부를 수 있었다.

◆ 전국경제인연합회 주도로 비상대책 마련

군사적 비대칭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산의 대응은 정부보다 빨랐다. 아산은 전경련을 통해 미군 철수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고 국제적인 여론을 조성하는 데 앞장섰다. 

한·미·일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초청해 수차례 대규모 국제 세미나를 개최했다. 또한 회사 조직을 가동시켜 각종 보고서와 발표문을 세계 각국의 학계와 정치계에 배포하는 홍보전을 펼쳤다. 컴퓨터나 인터넷은 물론 팩스마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978년 7월 어느 날, 아산은 안기부 5국장으로부터 부탁을 받는다. 주한 미군 철수에 대한 일부의 동조 분위기를 빌미로 북한이 일본에서 미군 철수를 획책하는 토론회를 개최하려고 하니 전경련이 먼저 토론회를 열어 여론의 악화를 막아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대통령 각하께서 우리의 정보 포착이 늦은 데 대하여 격노하고 계십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책을 세우느라 난리 났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사실 여기 오기 전에 대학과 국책연구소 등 여러 곳을 다녀봤습니다만 가능하다는 곳이 한 군데도 없더군요. 좀 도와주십시오."

1979년 11월 15일 동경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된 주한 미군 철수 저지 심포지엄

아산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봐요, 그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이오.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 이 마당에 경제고 뭐고, 나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소."

아산이 추진한 '애국세미나'는 대성공이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뉴스위크', 일본의 '산케이신문' 등 세계의 유수 언론들이 일제히 주목했다. 결국 북한이 개최한 세미나는 이미 검토된 주제에 대한 뻔한 주장을 반복해 실패로 끝났다.

◆ 꽃으로 일으킨 88 서울올림픽의 함성

1981년 9월 하순 독일의 온천도시 바덴바덴의 한 호텔, 67세의 장년이 된 아산은 방 안 가득한 꽃바구니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현대그룹 직원의 부인들이 정성들여 예쁘게 포장한 꽃바구니였다. 바구니 하나하나에 'Jeong Ju Yeoung'이란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이 아름다운 꽃바구니들은 그곳 79명의 IOC위원들에게 배달됐다. 선물을 받은 IOC위원들 사이에서 어느새 "한국인은 꽃처럼 마음씨가 고운 사람들"이란 칭찬이 나돌았다. 

운명의 날인 9월 30일 오후 3시, 제24회 올림픽 개최지를 발표하기 위해 사마란치 IOC위원장이 연단으로 올랐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많은 전문가들이 일본 나고야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장내를 한번 훑어본 다음 "세울! 코리아!"를 힘차게 불렀다. 

한반도는 환호의 물결에 뒤덮였고, 일본의 나고야는 고개를 숙였다. 일본보다 뒤늦게 출발한 88올림픽 유치전에서 민간 외교의 힘으로 대역전극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서울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정주영 회장이 '꽃으로 마음을 끄는 지혜'를 발휘해 바덴바덴의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세계의 스포츠와 경제계에서는 "한국 대통령의 이름은 몰라도, 현대의 정주영은 안다"라는 말이 번졌다. (계속)

1988년 서울울림픽 준비상황 점검차 서울 무교동 대한올림픽위원회를 방문한 사마란치 IOC위원장(가운데)과 정주영 회장(가운데), 노태우 전 대통령(좌측)이 환담을 나누고 있다. <사진=윤강로 박사 제공>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진행중)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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