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농촌의 어느 마을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보릿고개 밑에서 아이가 울고 있다. / 아이가 흘리는 눈물 속에 할머니가 울고 있는 것이 보인다. / 할아버지가 울고 있다. / 아버지의 눈물, 외할머니의 흐느낌, 어머니가 울고 있다. / 내가 울고 있다. 

1965년 황금찬 시인이 쓴 '보릿고개'의 일부다. 시인은 한국의 보릿고개를 킬리만자로, 에베레스트보다 높은 '해발 구천 미터'라고 표현했다. 살아 넘으면 다행이니 '내 딸을 백원에 팔아야' 하는 장진성 시인이 언급한 북한 상황에 못지않다. 공식 실업은 5분의 1, 절대 빈곤율은 40%에 육박했다. 누구든 돈벌이만 있으면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분위기였다. 

다행히 지구를 반 바퀴 돈 독일 땅에 일자리가 생겼다. 한국의 임금 수준을 10배가 넘는 광부, 간호사 일이었다. 정부가 공고한 첫 번째 파독 광부 모집에 2895명이 몰려 경쟁률이 15대 1을 기록했다. 1977년까지 독일로 떠난 광부는 8395명, 간호사는 1만371명에 이르렀다.

허허벌판이던 서울 구로동에 한국 최초의 공업 단지가 들어섰다. 전국 각지의 청년 11만명이 몰려 달동네 외딴방을 가득 메웠다. 첫 월급은 2만2천원, 가리봉 오거리는 서로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서는 걸음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번화해갔다. 가난의 시대를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1966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파독 간호사들

◆ 대서양의 남작 산업혁명과 함께 출항하다

"정부는 지금부터 철강, 조선, 석유화학 등에 박차를 가해서 이 분야에 제품 수출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이 울려퍼지기 2년 전, 정부는 국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대의 조선소 건설을 위한 차관 보증서를 발부했다. 특혜 논란이 일었지만 경공업으로 인한 성장은 이미 한계에 부딪힌 1970년대 초입이었다.

"정 회장, 차관도 됐고 배도 수주했고 부지도 마련이 됐다 했고, 그럼 남은 문제는 뭐요?" 

현대가 기존에 진행하고 있는 굵직한 공사만 20여건에 이르고, 국내에 숙련 기능공은 물론이고 26만톤급 배를 접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도크를 본 적조차 없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시작이 반인데, 수주까지 해왔으니 더 나간 셈 아니겠습니까…" 일단 쉽게 넘어가려고 하자 박정희의 안색이 변하며 정색을 했다.

"우리는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일본에는 없어. 끝이 반이라는 말은 있어도… 다 해놓고도 반밖에 못했다는 자세로 다시 살피고 검토하고 최선을 다해야지." 

아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국내 수주 활동을 중단하고 조선소 준공에 박차를 가했다. 바로 이때부터 노동집약이던 한국의 산업구조가 기술집약으로 바뀐다.

현대조선소가 신문에 조선 기술자 모집 광고를 내자 지원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하지만 농사용 쟁기는 사용해 봤어도 용접봉은 구경도 못한 이들이 다수였다. 아산은 '훈련원'부터 설치해 입사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을 제공했다. 기술을 배우려는 의지만 있으면 전력을 다해 받아들였다. 의장, 제조 절단 등의 기술을 단기간에 가르쳐 현장에 투입했다. 

조선소의 형태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현대중공업이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너무나도 서툴러서 불량이 쏟아져 나왔다. 소문을 들은 엿장수, 고물상들도 대거 울산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될 때까지 강판을 자르고 용접해 부품을 만들었다. 주말도 없이 퇴근은 보통 밤 11시였다. 2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로이드선급협회(Lloyd's Register)의 감독은 엄격했다. 골리앗 크레인이 없어 육상에서 만든 부품들을 견인 트레일러에 실어 도크로 이동시켰다. '현대가 만드는 저 배가 과연 뜰 수 있을까'가 세상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였다.  

진수(進水). 1974년 2월 15일 새벽 1시 도크의 수문을 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물이 차오르자 길이 345m, 폭 52m, 높이 27m의 거대한 철갑의 물체가 천천히 떠올랐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도크에서 배를 빼낸 뒤 부두벽(岸壁)에 붙이는 접안 작업이 남았다. 예인선이 없어 양측에 불도저를 동원해 26만톤의 물체를 끌어내야 했다. 아산을 비롯한 전사원이 밧줄을 함께 잡아당겼다. 몇 시간이 지나서야 1호선이 미끄러지듯 바다 위에 떴다. 

"배가 떴다! 마침내 진수가 이루어졌다." 전 직원들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질렀다. 

1974년 6월 28일 오전 11시 전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1호선의 명명식이 거행됐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요인, 외교사절, 기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울산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었다. 여기서 육영수 여사는 대서양의 남작을 뜻하는 애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호라고 배의 이름을 지었다. 

첫 해 400명으로 시작한 기술 교육은 80년내 초반까지 한 해에 적으면 1천여명, 많으면 1천8백여명까지 충원됐다. 현장 경험을 통해 기능을 숙달시켜 각종 국내외 기능경기대회에서 금·은·동메달을 따냈다. 이러한 기술 축적은 현대중공업을 세계 1등의 조선소로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정년을 맞이한 이들의 연봉은 1억을 넘어섰다. 수출 100억달러 시대를 여는 마지막 보릿고개의 정상을 넘는 순간이었다. (계속)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진행중)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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