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현대그룹>

한국 경제가 또 다시 기로에 섰다. 정유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맞이한 갈림길이다. 그 길의 한 쪽은 선진국으로의 도약대로 이어진다. 다른 한 쪽은 중진국 함정으로 이끄는 길이다.

어느 쪽 길을 택해야 할 지는 자명하다. 문제는 그 길이 순탄치 않다는 점이다. 출발점부터가 그렇다. 국내적으로는 저출산과 고령화 등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 국외에서는 갈수록 노골화되는 보호무역주의 경향과 중국 경제의 버블 붕괴 가능성 등 불확실성 요인들이 짙은 안개처럼 시계를 제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헤쳐 나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기업가 정신의 부활이다. 기업가 정신이 있으면 안개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발걸음을 뗄 수 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낸 1세대 기업인들이 그랬다. 그들에겐 케인즈가 얘기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있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무모할 정도로 도전하고 행동함으로써 산업화를 이루어 냈다.

선진국으로의 여정에 필요한 두번째 조건은 중간 이정표 역할을 해 줄 4차 산업혁명이다. 한국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4차 산업혁명에 성공한다면 고령화나 보호무역주의, 중국의 버블 붕괴 같은 장애 요인들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이에 이뉴스투데이는 신년특집으로 '기로에 선 한국 경제' 시리즈를 기획했다. 이 시리즈는 '1부 신기업가 열전'과 '2부 4차 산업혁명의 현장'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기업가 열전의 첫 주인공으로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를 택했다. 실패를 두려워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던 정주영 창업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여정을 시작한다.

◆ 가난 탈출의 반항 정주영 탄생시키다

아산은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정봉식(鄭捧植)·한성실(韓成實) 부부의 6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루 세 끼 밥 먹기 어려워 저녁에는 죽을 먹어야 하는 흙수저였다. 

다섯 살 되던 해, 서당 훈장이었던 할아버지는 아산에게 ‘천자문’을 읽게 했다. 여덟 살 때까지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대학', '맹자'를 배웠다. 하지만 집안 형편으로 사범학교 진학은 포기하고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새벽 다섯 시면 부친 손에 이끌려 다녔다.

어느 날 동아일보에서 청진항 공사와 제철공장 건설로 많은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접한 17세의 소년은 가출을 시도한다. "농사만 지어서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일이든 일단 닥치는 대로 해보자!" 

서울과 인천의 철도, 제철소 등 공사판을 찾아다니며 등짐, 품앗이 등 막노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첫 가출 때는 아버지가 장롱에 넣어둔 70원을 훔쳤다가 집으로 끌려오기도 했다. 4번의 가출 끝에 1934년 서울 인현동 쌀가게 ‘복흥상회’에 배달원으로 취직한다. 월급은 쌀 한가마니(80kg)가 주어졌다.

청소, 창고정리, 장부쓰기…. 온갖 일을 부지런히 찾아 하는 아산을 눈여겨본 사장은 가게를 확장하며 단골과 쌀 재고를 물려주었다. 그 밑천을 토대로 서울 신당동에서 ‘경일상회(京一商會)’라는 상호로 미곡상을 열었다. 가게는 논 6000평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번창한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쌀 거래가 공출로 막히자 1940년 가게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가 아버지에게 땅 2000평을 사드리고 변중석(邊仲錫) 여사를 만나 가정을 꾸렸다.

일제 시대 자동차의 모습

새 사업을 모색하던 중 자동차수리사업을 해보라는 단골손님 이을학의 권유를 들은 그는 고향친구들로부터 자금을 빌려 서울 아현동의 자동차수리공장 ‘아도서비스’를 인수한다. 하지만 아산의 첫 공장은 25일 만에 화재로 잿더미가 된다. 

졸지에 빚더미에 올랐지만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사업을 계속키로 했다. 남들보다 '더 빨리' 서비스하고 대신 '더 많은' 수리비를 받는 전략을 택했다. 신설동 빈터에 두어 평 남짓한 정비소를 꾸려 밤을 새웠다. 회사는 종업원 60여 명을 거느릴 정도로 성장했고, 자기 자신도 어느새 자동차의 모든 기능을 터득한 전문기술자가 되었다.

1942년, 일본이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중소기업정리령을 발포하는 바람에 2년 만에 사업을 접어야 했다. 외부 요인으로 인한 두 번째 좌절이었다. 

망연자실할 틈도 없이 그는 트럭 30대를 구입해 운송업을 시작했다. 황해도 수안군 홀동금광의 광석을 평남 진남포 제련소로 운반하는 하청이었다. 그런데 제련소 소장이 아산을 볼 때마다 광석을 흘린다며 잔소리를 해댔다. 트집을 잡아 자기 동기 친구에게 계약을 주기 위해서였다. 시달림에 지친 아산은 소장의 동기생에게 일감을 넘기고 1945년 5월 광산을 떠났다. 

이 때 아산의 수중에 남은 돈 5만원, 성북구 돈암동 경동중학교 앞에 있는 큰집을 마련해 이사를 했다. 3개월 후 일제는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다. 이후 홀동금광을 접수한 소련군은 그곳 사람들 모두 포로로 잡아 시베리아로 끌고 갔다고 전해진다. 아산이 그곳을 빨리 떠난 것은 천운이기도 했다.

1930년대 말 정주영 소유 트럭

◆ 사업 기회 놓치지 않는 기업가적 기민성

정주영을 산업 전선에 뛰어들게 것은 다름 아닌 가난에 대한 반항이었다. 쌀 시장의 배급제 전환과 전시 통제도 그를 중단시키지 못했다. 사업 상대가 믿음이 가지 않으면 과감히 내려놓기도 했다. 

세계적 공공선택학자 랜들 홀콤(Randle G. Holcombe) 플로리다주립대 교수는 "인간의 복지는 동일한 재화의 양적 증가로부터 오기보다 새로운 재화와 더 나은 생산 방식, 곧 혁신으로부터 온다"고 강조한다. 또한 "경제적 진보는 말이 자동차로, 타자기가 컴퓨터로 바뀌는 데서 오는 것이지, 더 많은 말과 더 많은 타자기를 생산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며 과잉 공급에 매몰되는 관습을 경계했다.  

자기 또래 친구들이 농사를 지을 때 공사판 막노동을 거쳐 자동차수리, 하청운송업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새로운 이윤 기회를 선점하기 위한 기민성’이었다. 이즈리얼 커즈너(Israel Kirzner) 뉴욕주립대 교수는 "새로운 상품과 새로운 생산 방법 등을 창출하는 혁신도 기업가 정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건국의 기쁨과 함께 찾아온 1949년 4월, 아산은 서울시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걸고 자동차정비업을 재개한다. 현대(現代)라는 상호의 첫 탄생이었다. 개인용 승용차가 거의 없던 시대, 주로 관용차를 정비했다. 그해 연말 일괄 수리비를 받기 위해 관청을 들렀다 건설업자들이 자기보다 10배가 넘는 돈을 받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똑같이 죽어라 일하는데 누구는 10배를 받아 가는가!" 곧바로 그는 1950년 1월 현대토건사와 자동차공업사를 합병해 현대건설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그해 7월 연안 해운업에도 진출해 현대상운까지 세웠다.  새로운 사업 기회가 포착될 때마다 그에게 내재된 '야성적 충동'이 작동한 것이다.(계속)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현대그룹 아산 정주영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의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을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그룹 대산 신용호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그룹 우정 이동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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