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을 쓴 애덤 미스의 동상. 스코틀랜드 애던버러 로열 마일에 세워져 있다.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돈을 버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술, 다른 하나는 기업이다. 자유 경쟁 시장에서 자본과 기술이 결합하면 큰 사건이 일어난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이 매튜 볼턴(Matthew Boulton)과 같은 걸출한 기업인과 만나 산업혁명을 이룬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인공지능, 클라우드 등 4차 산업혁명 기술이 기존의 산업과 융합해 성장을 이끄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발명과 혁신은 다른 영역이다. 아무리 탁월한 R&D의 결과물이라도 기업가정신과 만나야 성공이 가능하다. 애덤 스미스는 이를 일컬어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다.

◆ 아름다운 동업…순탄치 않았던 무역업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위축된 경제가 깨어나기 시작했다. 전쟁 중에 극심했던 경제 통제가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한반도는 38선을 기준으로 자유세력과 공산세력으로 나뉘었다. 북은 전체주의 체제 강화를 위한 중앙계획을 도모했고 남에는 시장경제가 들어섰다.    

장사와 무역으로 20여년의 경험을 쌓은 연암에게 진주는 너무 좁았다. 구인상회의 문을 닫고 부산 서대신동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생 철회와 정회에도 힘을 모아 같이 일해보자는 전보를 보냈다. 그렇게 일본 대마도에서 생산되는 목탄을 수입해 파는 무역업을 개시키로 하고 조선흥업사(미군정청 허가 제1호)를 설립했다. 

하지만 배가 쓰시마 섬에 숯을 구하러 가던 중에 풍랑을 만나 좌초하는 등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장인과 재종간인 만석꾼 허만정(許萬正)씨가 셋째 아들 준구(전 GS건설 명예회장)를 데리고 연암을 찾아왔다. 

"내가 사돈의 역량은 익히 알고 있는 터라 청을 하러 왔소. 이 아이를 맡기고 갈 터이니 밑에 두고 사람 좀 만들어주소. 사돈이 하는 사업에 내가 출자를 할 작정이오." 

앞길이 난망한데 사돈 자제 경영 수업이라니…. 그러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경영은 구씨 집안이 알아서 잘한다. 처신을 잘해서 돕는 일에만 충실하라"는 것이 만정씨의 생각이었다. 구씨와 허씨의 3대에 걸친 동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락희화학공업 시절 구인회 회장과 구평회 E1 명예회장,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구자두 LB인베스트먼트 회장 (왼쪽부터) <사진 제공=LG그룹>

1946년 초봄, 서울로 달리는 경부선 열차에 연암과 정회가 올라탔다. '아마쓰구리무'라는 화장품 크림 500타를 팔아보기 위해서였다. 당구장을 자주 찾던 동생 정회가 크림 생산업체인 흥아화학의 기술자 김준환(金俊煥)과 친해진 것이 인연이었다. 남대문시장을 샅샅이 훑고 다녔으나 크림 6000개를 한꺼번에 사들이겠다는 상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낙심한 형제들은 위탁판매를 결정하고 귀향길에 올랐다. 

겨울이 오자 상황은 반전했다. 기존의 일본제품의 재고가 바닥나고 수요가 늘어 주문이 쇄도한 것이다. 인터넷뱅킹이 없던 시절, 70만원어치 물건을 넘겨주고 100만원을 받아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

"빨간 뚜껑 크림은 안 됩니다. 까만 뚜껑도 며칠 더 기다리세요…" 

물건이 잘 팔리니 흥아화학이 변했다. 배짱을 퉁기며 출고 물량을 제한했다. 거래상 지위를 남용해 거래를 거절하는 횡포를 부렸다. 급기야 두 회사를 연결한 김준환이 사장과 멀어져 회사를 떠나는 상황까지 왔다. 김 씨는 혼자 공장을 운영해 볼 생각이었으나 자본이 없어 고민 끝에 연암을 찾았다. 

"원료 문제를 해결하고, 투자만 하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부산 영도에 있는 데지마(出島)비누공장을 인수하면 그 곳에 있는 원료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차라리 직접 만들어 파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던 연암은 전 재산을 털어 원재료를 확보했다. 구인상회까지 팔았더니 300만원이 되었다. 기술과 자본의 운명적 만남이었다.   

◆ 기업가가 '보이지 않는 손'을 만날 때

"모두 와서 크림을 만들어보자!" 

자그마치 200만평의 땅을 팔아 마련한 글리세린과 향료들이 크림이 되느냐, 못 쓰는 기름 덩어리가 되느냐가 김 씨의 손에 달린 순간이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중에 탄성이 터졌다. "저것이 크림인가? 저렇게 만드나, 신기하다!" 

럭키(Lucky)는 행운의 뜻도 있고 우리말로 음역하면 락희(樂喜)로 즐겁고 기쁘다는 뜻도 된다. 상표명과 디자인은 구정회가 제안했다. <사진 제공=LG그룹>

당시 크림은 한타에 500원이었는데, 여배우 디에나 더빈(Deanna Durbin)의 사진으로 디자인한 '럭키크림'은 1000원을 불러도 상인들이 서로 달라고 할 정도였다.

락희화학공업사는 대표이사 구인회를 중심으로 대외협력을 담당한 구정회, 영업을 맡은 허준구와 허신구(許愼九) 그리고 생산을 맡은 김준환은 밤을 새워가며 크림 생산과 판매에 총력을 다 했다. 

한때 글리세린이 아닌 글리콜로 만든 크림을 사용해 문제가 발생했으나 전량 회수 조치로 시장의 평판을 유지했다. 크림통 뚜껑이 쉽게 깨지기도 해 소비자들의 항의가 발생하자 서울에 연구소를 차려 합성수지를 국내 최초로 개발, 플라스틱 시대를 열기도 한다. 그렇게 달성한 연 매출이 무려 3억원이다. 

기술과 기업이 만나지 않고 따로 놀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1950년 2월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 조치가 있기도 전에 전 재산의 토지를 털어 상업자본으로 전환한 인물은 구인회 회장이 유일하다. 기업가 정신과 보이지 않는 손이 일으킨 기적이었다. 

락희화학이 이렇게 번창하는가 싶었는데, 1950년 6월 25일 북한 김일성이 소비에트 연방의 지원을 받아 새벽에 남침하며 전쟁이 시작됐다. (계속)

1947년 부산 서대신동에 위치한 연암의 자택이자 크림 공장. 이곳에서 럭키크림이 탄생했다. <사진 제공=LG그룹>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진행)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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