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부터 기업가정신 지수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2016 국제기업가정신총회(Global entrepreneurship summit)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8년간 기업가정신 활성화를 위한 각종 지원 정책을 펼쳐왔다.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는 페일콘(Failcon)이라는 콘퍼런스가 있었다. 젊은이들이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고 정보를 나누던 이 행사는 2년 전부터 열리지 않고 있다. 경험을 공유하는 문화가 너무나 일반화되어 행사 같은 것이 더는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평균 2.8회의 창업을 한다. 기본적으로 세 번의 실패는 겪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디까지나 평균이기 때문에 10번 이상 실패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도 일어선다. 성공에 비하면 실패비용은 크지 않다. 

'빨리, 일찍, 자주 실패하라'가 실리콘밸리의 격언이다. 진주의 신흥상인이라는 이름을 떨치게 되는 구인회는 마치 실패를 위해서 도전을 하는 것처럼 사업을 혁신해 나갔다. 그에게 사업이란 과거로부터 이어져온 관습을 뒤집어 새로운 부를 창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염창강에서 이름을 따온 창강정(滄江亭)의 모습. 승산마을에 위치한 능성 구씨 대종중의 제각이다. <사진=LG그룹>

◆ 반복되는 실패…혁신을 가속하는 구인회상점

연암이 진주에서 간판을 올린 1931년 7월, 규모가 작은 ‘구인회상점’이 수익을 내기는 쉽지 않았다. 이듬해 3월에 결산하니 500환의 적자가 났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4환5전이었으니 100가마니가 넘는 엄청난 결손이었다. 또다시 집에 손을 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밑천이 적어 경기변동에 따른 수지를 맞추지 못했다고 판단한 연암은 부친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라는 대답을 예상했으나, 아버지의 반응은 의외였다. "무엇이든 10년은 해 봐야 결판나지 않겠느냐…" 부친 소유 땅문서를 담보로 동양척식회시로부터 8천환을 융자받을 수 있었다. 1932년 11월 천종상회 맞은편으로 점포를 이전하고 ‘비수기에 싸게 사서 성수기에 제값을 받는’ 사업 전략을 펼쳤다.

그러던 1936년 여름, 며칠 동안 퍼붓던 장맛비가 진주 남강 둑을 무너뜨렸다. 강물이 범람해 연암의 가게는 물론 진주의 전 시가지가 흙탕물에 잠겼다. 병자년 대홍수였다. 산더미 같은 은행 부채에 시작도 제대로 해보기 전에 모든 재산을 잃게 된 불행이 닥친 것일까. 

연암은 절망하지 않았다. 홍수가 잠잠해지면 포목 수요가 급증해 큰 이익을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재력가 원준옥으로부터 1만환을 빌려 가게를 복구했다. 연암의 예상대로 그해 진주에는 대풍이 들고 포목은 불티나게 팔렸다. 

경영의 목적이 이익 창출에 있음을 자각한 연암은 거침이 없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전시 특수 경기를 예측해 8만엔의 이익을 냈다. 단순한 상품 판매뿐만 아니라 견직물에 수(繡)로 디자인을 입혀 소비자의 시선을 끌며 혁신의 페달을 밟았다. 

◆ 길어지는 전쟁…끝없는 사업 기회 모색

1939년 11월 길어지는 전쟁이 진주의 신흥상인이라는 이름을 떨치던 연암의 발목을 잡았다. 일제로부터 기업정비령이 떨어져 포목 거래가 금지된 것이다. 극심한 혼란기 개점휴업 상태가 된 포목점은 동생 구정회(具貞會)에게 맡기고 상호를 ‘주식회사 구인상회’로 변경하는 한편 끊임없는 사업전환을 모색했다.

당시 유일하게 상거래가 가능한 품목은 어물과 청과물이었는데, 여유 자금을 외숙 하길생(河吉生)이 운영하던 어물상에 투자했다. 배도 한척 마련해서 진주 어시장에 내다 팔았더니 순식간에 동이 났다. 동시에 무역업으로 눈길을 돌려 막내처남 허윤구(許允九)가 운영하는 조만물산에 투자, 일본과 만주를 드나들며 보폭을 해외로 넓혔다. 일본산 마늘·명태를 수출하고 만주로부터 대두를 수입하는 사업이었다.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가 없다니…"

품목이 제한이라면 몰라도 가격까지 통제되는 전시 경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목탄 화물차 30대를 마련해 운송업에 도전했으나, 전부가 도청이 헐값에 내놓은 고장 난 차들이었다. 수리할 수도 있었으나 깨끗하게 포기하고 고민 끝에 진양, 의령, 함안, 고성 등지의 땅을 샀다.

◆ 항일 독립운동 지원…그 아버지에 그 아들

진주만 폭격과 함께 시작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5월의 어느 날, 백산 안희제(安熙濟)가 연암을 찾아왔다. 백산은 항일 독립운동에 젖줄의 역할을 한 인물로,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와 만주 독립운동 자금의 6할이 안희제의 손을 통해 나왔다"고 언급할 정도의 거물이었다.

1927년 일제의 탄압으로 백산상회가 문을 닫은 뒤 언론을 활용한 독립운동을 펼치다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라는 독립기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연암의 조부 구교리와 홍문관 생활을 함께한 안효제 교리의 아우로 안교리와 함께 여러 번 승산을 방문한 인연이 있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있는 백산의 흉상

대한민국 임시정부 첩보 36호 백산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제의 패망은 이제 시간문제일세.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네. 그러니 자네도 1만환을 기부해주게." 

당시 1만환은 지금의 돈으로 4억원 가량, 돈도 적은 것이 아니었지만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이에게 독립자금을 지원하는 건 목숨이 열 개라도 위험한 일이었다. 사업기반은 물론이고 집안까지 풍비박산이 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을까. 연암의 부친 구재서공도 1928년 무렵 의열단원 구여순 선생을 통해 김구 주석에게 5천환을 전달한 적이 있었다. 연암은 1만 환을 기꺼이 내놓았고 독립자금은 임시정부에 전달되었다. 

백산은 1943년 2월 임오교변으로 체포돼 여러 차례 고문 끝에 1943년 8월 3일 숨을 거뒀다. 맏손자 구본무(具本茂)가 태어난 1945년 여름 광복이 찾아왔다. 그 해 연암의 나이 38세였다. (계속)

사무실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LG그룹 구인회 창업회장 <사진=LG그룹>

 

'2017 기업가의 부활' 연재 순서

① 우리시대의 거인 아산 정주영 회장 
② 한국 경제부흥의 선구자 연암 구인회 (진행중)
③ 세계를 품었던 경영인 SK 최종현 회장
④ 한국이 낳은 최고의 기업가 호암 이병철 
⑤ 나라사랑 온몸으로 실천한 청암 박태준
⑥ 경제 외교의 선구자 두산그룹 연강 박두병
⑦ 국가 기간산업에 평생을 바친 현암 김종희
⑧ 중공업을 일으킨 불굴의 개척자 운곡 정인영 
⑨ 20세기 문명 전환 이끈 김성수, 김연수 형제
⑩ 삼성과 효성을 일으킨 혁신가 만우 조홍제 
⑪ 한국 물류 운송의 신기원 일으킨 정석 조중훈
⑫ 교육·문화 보국의 선구자 교보 신용호 회장 
⑬ 한국 섬유혁명의 아버지 코오롱 이동찬 회장
⑭ 살아 있는 '김키스칸 신화' 대우 김우중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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