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산을 물려주는 상속과는 엄연히 다른 세습은 주로 신분을 대물림한다. 타인의 권리나 의무 등을 이어받는 승계와도 구분되는 개념이다. 권리의 객관화가 전제되는 승계와 달리 세습은 매우 가족 친화적이며 탐욕적이다. 근래 들어 어감도 불온해졌다. 고용세습 의혹은 일부 한국 대형교회 세습 문제와도 잇닿아 있다.

직설하자면 지금 논란들은 세습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습이 실행되기 전에 이미 권한을 이권으로 치환하는 문제와 이러한 이권을 세습 당사자가 자녀에게 사유화하고 있다는 데 고용세습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부 노조가 될 수도 있고 성경을 사유화하는 일부 목회자가 될 수도 있다.

인류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습의 역사는 승계에서 비롯된다. 역사도 유구하다. 원시 사회에서 인류는 일반적인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과 유사하게 개별적인 서열이나 우두머리 등이 존재했다. 네안데르탈인의 시대에서는 원시적 종교가 존재해 주술적이지만 사제와 같은 기초적인 계급 사회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지도자의 직책이 후손에게 단순히 이양되는 것이 아니라 힘이 강한 자나 리더십이 뛰어난 자 혹은 연륜이 깊어 경험이 풍부한 자 등 무리를 이끌 능력 중심으로 권력이 이양됐기 때문이다.

그다지 과학적이지는 않으나 정성평가의 꼴을 지녔다. 납득할만한 승계이기에 무리에서 동요는 없었다. 수렵 사회 리더의 우월한 신체적 유전자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권한을 이양 받을 확률은 상대적으로 높았지만 이를 불온한 세습이라 칭하기엔 무리가 있다. 적어도 무리를 이끌 능력이 동의됐기 때문이다. 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의 고용세습이 원시의 승계보다 더 미개한 이유이다.

상투적이지만 주장의 객관화를 위해 통계를 들이대자면 2016년 고용노동부가 기업 2769곳에 대한 노사 단체협약을 조사한 결과가 있다. 정년퇴직자나 장기근속자 자녀, 업무상 사고·질병·사망자 자녀에게 입사 시험 때 가산점을 주거나 우선 채용 또는 특별 채용 혜택을 주는 조항을 둔 곳이 694곳에 달했다. 주목할 것은 중소기업보다는 대기업에 ‘고용세습’ 관련 단협 조항이 유독 많았다.

만민의 평등이라는 노동운동 본령을 생각한다면 아프고 저린 대목이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세습의 정도다. 업무상 사고·질병·사망으로 인해 조합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녀에게 입사 시험 때 가산점을 주거나 우선 채용 또는 특별 채용 혜택을 주는 포용적 복지 세습은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다.

반면, 중세 시대 작위를 자식에게 대물림하듯 정년퇴직자 자녀를 우선 채용하는 내용의 단체협약은 명분도 없고 무임승차의 전형이기에 민주적이지도 않다. 공정사회에서 능력을 검증해내기도 게임의 룰을 지켜내기도 용이하지 않기에 더더욱 그렇다. 고용세습의 정당성을 제아무리 주장해도 그 논리가 궁색한 이유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단일하지 않다. 선인 줄 알았던 것의 민낯을 보거나 악인 줄 알았던 것의 절박함이 일상에 도사리고 있다. 항간의 고용세습 논란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를 내 것처럼 느끼면 굴절된 표현에 허물이 있어도 공감의 마음이 앞선다. 고통의 공감이 배제되면 스스로 정의롭고 합리적이라 믿는 사람일수록 청년들의 분노가 노사 간, 자율적 단체협약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오류이며 보수진영의 노조 말살 공작이라는 생각이 앞설 뿐이다.

이념지상주의가 득세하는 사회에서는 말할 나위가 없다. 무릇 노동운동이라면 국민으로부터의 설득력과 대중성을 획득하지 못한 한계에 부끄러워해야지, 진정성을 몰라준다고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용세습 논란 속에 업무상 재해를 입은 조합원 자녀의 포용적 승계는 이해되나 작금의 현실은 그 배경과 방법이 불온하다. 작금의 고용세습은 자기 것이 아닌데도 부당하게 자기 것으로 삼는 전유행위의 전형이며 이를 ‘일자리의 가족 전유’라 칭해도 무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며 누구든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차별받지 아니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항에서는 ‘사회적 특수 계급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명시돼 있다. 이런 헌법 정신은 부모가 자식에게 일자리를 물려주는 고용 세습의 단체협약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용 세습 대상은 그 경쟁을 피할 수 있기에 취업 기회의 공정성을 해친다. 구직난에 잠 못 이루는 청년들에게 참으로 몹쓸 짓이다.

최근 대학에는 고용세습 의혹을 비판하는 대자보가 자주 붙는다. ‘헬 조선의 음서제’로 규정하거나, ‘유빽유직 무빽무직’이란 신조어로 의혹을 힐책한다. 물질만능의 척박한 자본의 시대에 사람이 희망인 노동운동의 존재는 소중하고 가치 있다. 그러하기에 고용세습을 둘러싼 청년들의 이 같은 분노를 지켜보는 가슴은 더 처연하다.

근간의 고용세습 논란이 노동조합을 마냥 공격하기 위한 악의적인 프레임이라고 치부돼서는 안 된다. 노동운동의 평등성이 노조가 지켜내야 할 절대가치라면 고용세습에 대한 항간의 비판에 통렬한 자성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한 사회에서 표출되는 과격한 목소리들의 배후에는 대개 과격한 고통이 있다는 점을 노동운동이 주목해야 한다. 고용세습에 대한 청년들의 비판은 과격한 고통이 전제된 비판이다. 청춘들에게 일자리는 존재의 이유이지 않겠는가.

젊은 사회학자 김홍중은 ‘마음의 사회학’에서 “타인을 누르고 혹은 타인 대신에 내가 살아남고 성공한다는 것은 드러내어 자랑하거나 과시할 일이 아니라 적절히 숨겨야 하는 부끄러운 것이며, 이런 마음의 형식이 통용되던 시대를 ‘진정성’의 시대라 부른다”라고 말한다.

고용세습, 그 서늘한 ‘속물성’이 우리 시대 ‘진정성’이 배제된 노동운동 일부 사람들의 불온한 그늘은 아니던가. 양극화로 고단한 이 시대, 노동운동이 해야 할 건강한 일은 아직 태산이다.

前 노사정위원회 위원
前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現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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