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를 달리던 차가 사고를 냈다. 운전자의 과실로 간주돼 처벌이 내려졌다. 그런데 얼마 뒤 같은 지점에서 또 다른 운전자가 사고를 냈다. 그 뒤로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같은 지점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이쯤 되면 마냥 운전자의 과실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도로의 설계나 포장 상태, 신호체계 등에 결함은 없는 지를 따져봐야 한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특검의 조사를 받고 나오는 장면을 보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 부회장의 굳은 표정 위로 다른 기업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그 측근에게 뇌물을 줬다는 혐의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섰던 기업인들이다. 멀게는 일해재단 사건부터 가깝게는 포스코 비리 사건까지.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 김현철 비리 사건, 옷 로비 사건, DJ 아들 비리 사건, 박연차 게이트 등등…기업인들 중에는 겹치기 출연자도 꽤 있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기업인들이 이처럼 반복적으로 대통령과 관련된 뇌물죄에 엮이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에서만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앞의 교통사고 예화에서 얻을 수 있는 팁은 ‘기업인의 과실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도로의 하자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 경우의 도로란 무엇인가. 기업인을 둘러싼 '한국적' 환경이다. 그 중에도 ‘권력과의 관계’라는 지점에서 번번이 사고가 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채찍과 당근 두 가지 수단으로 기업인들을 조종한다. 채찍은 검찰로 대표되는 사정당국이다. 당근은 각종 특혜조치다. 기업인들은 채찍을 피하기 위해서, 또는 당근을 얻기 위해 권력에 돈을 바친다. 이중 당근을 얻기 위해 제공하는 돈은 당연히 뇌물에 해당된다. 또 맞아야 마땅한 채찍을 피하려는 의도로 제공하는 금품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억울하게 채찍을 맞게 될 것을 우려해 제공하는 금품이다.

이번 최순실 게이트는 어디에 해당될까. 기업인들은 너나없이 대가성은 없었음을 강변하고 있다. 청와대측의 요구에 압박감을 느껴 돈을 냈다는 얘기다.

앞서 열렸던 국회청문회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미르·K스포츠 모금 배경에 대해 “청와대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이게 한국의 현실이다”라고 발언했다. 이재용 부회장도 “뭐를 바란다든지 반대급부를 요구하면서 자금을 출연하거나 지원한 적은 없다”고 답했다. 내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채찍이 두려워’ 자금을 지원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기업인들은 현 정권이 출범 초기부터 포스코, 효성 등 전임 MB정권과 가까웠던 기업들에게 채찍을 가하는 것을 목도했으니 두려움을 가질 만 했다.

기업인들의 이 같은 진술은 ‘일해재단 사건’과 비슷하다. 일해재단은 1983년 버마 아웅산 테러 유가족 지원 명목으로 설립돼 1987년까지 대기업들로부터 약 600억 원의 출연금을 모금했다. 정권이 바뀐 후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등은 이를 “강제 모금이었다”고 폭로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도 5공 비리 청문회에서 재단 출연 배경에 대해 “내라고 하니까, 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서 냈다”고 발언했다. 이에 당시 ‘5공 비리 특별수사부’는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등 2명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구속했지만 출연 기업인들은 처벌하지 않았다. 강제 모금이었다는 기업들의 하소연을 인정한 셈이다.

반면 이번 사건을 두고 반기업적 성향의 인사와 사회단체(NGO)들은 기업들이 대가를 바라고 돈을 건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계열사 합병 지원(삼성), 면세점 특허(롯데), 총수의 사면(SK) 등 당근을 얻으려는 목적이었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이들은 그 같은 주장을 각종 매체의 기사와 촛불집회 연설 등을 통해 확산 시키며 “기업인들을 당장 구속하라”는 식으로 특검 수사를 압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을 두고 이런 식의 압박을 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특히 돈을 건넨 쪽만 조사하고 돈을 받은 쪽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사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인들부터 무작정 구속하는 것은 상식적인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따라서 수사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이제부터라도 특검이 금권을 의식하지도, 여론에 흔들리지도 않고 오로지 법과 양심, 그리고 증거에 의해 판단하기를 기대하며 수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옳은 자세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이번 수사를 통해 기업인들이 반복적으로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는 한국적 현상의 근본 원인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진단과 해결책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임혁 편집인 lim54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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