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생산 현장. [사진=SK하이닉스]
반도체 생산 현장. [사진=SK하이닉스]

[이뉴스투데이 고선호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기업을 중심으로 한국 반도체 업계가 글로벌 시장에 대해 영향력을 떨치고 있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관련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파로 성장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욱이 원료 원가 상승세와 업황 악화 시기가 겹치면서 대기업을 비롯해 업계 전반에 침체가 찾아온 상황에서 관련 지원이 쪼그라들자 사업을 영위하거나 연구를 지속하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1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 연구원 등에 따르면 12대 국가전략기술 관련 198개 연구개발 사업에 편성된 내년 정부 예산이 지난해 대비 크게 축소된 가운데 인공지능(AI) 28%, 첨단모빌리티 27%, 반도체·디스플레이 26%, 차세대통신 24% 등의 감소율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가 중점 육성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던 ‘국가전략기술 R&D 사업’ 부문의 예산도 삭감을 피하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3대 미래기술’로 꼽히는 AI, 첨단바이오, 양자기술 등의 주요 사업은 물론, 일부 사업은 종료 수순을 밟을 위기에 직면했다. 전체 예산 규모만 보면 R&D 예산만 5조2000억원가량이 줄었다.

지난해 산업통상자원부가 국회에 제출한 2024년 예산안을 보면 차세대 반도체인 PIM 기술을 개발하는 PIM인공지능반도체핵심기술개발(R&D) 예산은 197억원 대비 13억원이 줄은 184억원으로 편성됐다. PIM인공지능반도체핵심기술개발은 957억원에 달하는 국비를 투입해 2022년부터 오는 2028년까지 진행 중인 중점 연구 사업이지만, 당초 예산보다 24억원이 축소, 편성됨에 따라 사업 추진에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경량 프로세서를 비롯해 스토리지, 센싱 등 시스템반도체 5대 범용기술을 미래차, 바이오, 스마트가전, 첨단기계·로봇 분야 등 국내 주력산업과 연계한 상용화 중심 시스템반도체 개발 등을 지원하는 차세대지능형반도체기술개발(설계·제조) 사업의 내년 예산도 지난해 743억원에서 114억 줄어든 629억원에 그쳤다. 반도체 산업의 핵심으로 떠오른 시스템반도체 부문 육성을 위한 ‘시스템반도체핵심IP’(반도체 설계 자산) 개발 관련 사업 예산도 83% 이상 줄었다.

반도체 산업 생태계 육성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추진돼 온 중소·중견 팹리스기업을 육성 전략제품 창출 글로벌 K-팹리스 기술개발 예산 역시 200억원이나 감소했다. 전체 스마트전자기술개발 관련 부문도 총 예산으로 따지면 591억원의 삭감이 이뤄졌다.

이 밖에도 △수요기반형 고신뢰성 자동차반도체 핵심기술 개발사업 예산 –10억원 △차량용 반도체 성능평가 인증지원사업 예산 –54억원 등이 감액된 규모로 편성됐다.

출연연 관계자는 “예산 삭감 자체도 문제지만, 줄어든 분야의 면면을 살펴보면 일관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며 “정부가 중점 추진해오던 사업 예산도 줄었고, 국가전략으로 다뤄지던 R&D도 동급으로 삭감이 이뤄졌다. 사실상 관련 부처나 전문가들이 짠 예산(안)으로 보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꼬집었다.

[사진=삼성전자]
[사진=삼성전자]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 소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예산이 올해 22.5%나 줄어들면서 연구자 및 학생연구원 등을 중심으로 한 학계와 관련 업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주요 출연연의 예산 규모 감소로 그동안 관련 지원에 의지해 연구작업을 이어오던 이공계 대학원생이 연구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속출하는 등 부작용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어서다.

이에 정부는 지난달 이공계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월급처럼 지급하는 ‘연구생활장학금(스타이펜드)’ 지원제도를 내년부터 도입, 논란을 불식시키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지원을 위한 전체 예산 규모나 예산 확보 방안 등이 포함되지 않으면서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장 국책 사업 등 주요 R&D 과제를 처리해야 할 출연연들도 예산이 대거 삭감되자 인건비 처리에 비상이 걸렸다.

연구과제중심제도(PBS)에 기반한 출연연 연구원 인건비는 R&D 과제에 의존해오고 있는데, 과제별로 크게는 80% 이상 예산이 삭감되자 인건비가 부족해 기존 연구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있다.

각 출연연은 급격한 긴축 재정 상태에 접어들자 전년도 예비비와 기존 사업 예산을 버무려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고는 있다. 그러나 소진 시점까지 관련 예산의 증액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조직 경량화를 넘어선 진짜 위기에 직면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과학연구단체 소속 관계자는 “인건비가 부족해 연구를 이어가거나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더 큰 문제는 예산 규모를 보고 과제를 선정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라며 “말 그대로 연구자들이 ‘돈이 되는’ 과제에만 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공공의 상황과는 달리 민간 기업들은 어려운 시기에도 R&D 투자 규모를 늘려가며 성장에 집중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이달 초 발표한 2023년 연간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약 28조4000억원 규모의 R&D 투자를 단행했다. 이는 매출액의 10.9%로 달하는 규모로, 실적은 감소했지만, R&D 투자금액은 2.7%가량 늘었다. 심지어 삼성전자 창사 이래 두 자릿수 비중을 차지하는 연구개발 투자가 이뤄졌다.

SK하이닉스도 R&D 확대에 고삐를 당기고 있다. 작년 상반기 기준 SK하이닉스가 R&D에 투자한 금액은 2조863억원으로, 금액만으로는 전년 대비 13% 가량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관련 투자 비중은 16.8%로 7.5%p 증가했다. SK하이닉스 역시 줄어든 실적에도 R&D에 대한 투자는 더욱 늘려간 셈이다.

양사는 자체 R&D 투자뿐만 아니라 정부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도 동참한다. 오는 2047년까지 총 622조원을 투자해 16개의 연구 및 생산시설 조성을 추진한다. 이 중 삼성전자의 투자 규모만 500조원에 달하며, SK하이닉스도 122조원을 투자해 4개의 인프라 조성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정부 차원의 예산 및 세제 지원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지만, 사실상 관련 프로젝트 전반의 추진과 산업단지 구축부터 R&D 인프라 구축 등을 양사가 떠맡고 있어 민간 기업들에 의지한 프로젝트가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반면 주요 거래 국가들은 국내 반도체 업계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예산 규모부터 축소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시장인 미국은 반도체지원법에 근거해 80억달러(한화 약 10조6000억원)의 보조금을 텍사스주 테일러 공장 건설을 추진하는 삼성전자에 지급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도체 생산지원금은 직접 보조금의 경우 전체 프로젝트 자본지출의 5~15%다. 삼성전자의 투자액을 250억 달러(약 33조2000억원)로 가정하면 산술적으로는 최대 37억5000만달러(약 5조원)의 보조금이 예상돼 왔다. 하지만 삼성전자 보조금 규모가 70억 달러에 육박할 수 있다는 것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는 TSMC가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보조금 규모 50억 달러(약 6조6000억원) 보다도 많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반도체 부문은 타 국가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의 막대한 성장을 이뤄왔다. 이는 민간기업의 성과뿐만 아니라 학계와 공공부문의 연구성과도 영향을 미친 것”이라며 “하지만 정작 관련 부문의 성장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작 정부는 이를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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