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성남 시장이 포퓰리스트를 자처하고 나섰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다. 기자가 청년배당 등 그의 무상복지 시책을 두고 “포퓰리즘 아니냐”고 묻자 이 시장은 대뜸 “나는 포퓰리스트다”라고 답했다. 예상치 못한 쿨한 답변에 기자가 순간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지지자들은 신선하게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시장의 ‘포밍아웃’(포퓰리스트 커밍아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작년 말 한 농업인단체 행사에서도 농업인에 대한 기본소득 지급 등을 역설하며 “나는 포퓰리스트가 맞다”고 고백(?)했다.

인민주의나 대중영합주의, 또는 대중추수주의로 번역되는 포퓰리즘은 그다지 좋은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국내 정치의 장에서는 그렇다. 최근 몇 차례의 선거에서 포퓰리즘 시비가 붙었던 것도 그래서다.

그럼 이 시장은 왜 포퓰리스트를 자처하고 나선 것일까? 그의 발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이 시장은 포퓰리즘에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고 자신은 전자의 경우라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앞서의 농업인단체 행사에서 그는 “선거에 의해서 뽑힌 사람들이 국민이 맡긴 예산과 권한을 최대한 아껴서 표 얻으려고 좋은 정책 해주는 게 나쁜가? 좋은 포퓰리즘이다”라고 말했다.

이 시장의 인식은 옳은 것일까? 일단 포퓰리즘이 여러 유형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사실이다. 지난번 미국 대선만 봐도 버니 샌더스는 좌파 포퓰리스트, 도널드 트럼프는 우파 포퓰리스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서로 지향점은 달랐지만 엘리트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적개심에 호소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또 학자들 중에는 정치적 포퓰리즘과 경제적 포퓰리즘을 구분하고 이중 후자에 대해서는 때때로 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대니 로드릭 교수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정당성이 인정되는 경제적 포퓰리즘의 사례로 뉴딜정책을 예시했다.

그러나 이런 변론(?)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본질이란 ‘단기적 시야에서의 인기영합’이다.

정치인들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임기에 당장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에 집착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은 상당부분 장기적으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시간 비일관성(time-inconsistency)’ 문제가 바로 이 것이다. 페로니즘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즘 후유증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이 시장이 ‘좋은 포퓰리즘’이라고 포장해 내놓는 포퓰리즘에 경각심을 가져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권자들에게 좋다고 하지만 그 좋은 효과의 유효기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따져야 한다는 얘기다.

선거공학적 측면에서도 이 시장의 발언은 경계심을 갖게 한다. 타이밍의 문제 때문이다. 그는 왜 이 시점에 포퓰리스트임을 자처하고 나섰을까? 아무래도 6월에 있을 지방선거에 눈길이 간다.

이 시장의 발언이 지방선거에서 여당 후보들의 포퓰리즘 공약에 족쇄를 풀어주는 신호탄이 되는 건 아닐까? 아예 처음부터 내놓고 “나는 포퓰리스트다”라고 선언하고 나서는 후보에게 포퓰리스트라는 비판은 약발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지난해 발간된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의 저자 얀 베르너 뮐러 프린스턴대 교수의 말은 이 시점에 다시 경청할 필요가 있다.

그는 “포퓰리즘은 ‘국민이 직접 통치하게 하자’는 민주주의의 최고 이상을 실현해주겠다고 약속하는 타락한 형태의 민주주의”라고 규정한다. 또 포퓰리스트의 특징에 대해 “그들은 기득권 정치엘리트 집단이 부도덕하다고 비판하며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강변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쓰는 언어는 거칠고 태도는 무례하며, 반대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반다원적 태도를 취한다”고 갈파하기도 했다. 이재명 시장도 귀담아 들었으면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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