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다들 ‘탄소중립’을 말하고 있다. RE100(재생에너지 100%)은 그 용어조차 낯설다. 하지만 우리는 겨울철 심한 미세먼지를 경험하고 점점 더 강한 태풍이 한반도를 덮치는 여름을 보내며 기후위기를 대비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곤 한다. 2024년을 맞아 석탄부터 신재생에너지까지 에너지원을 차례로 짚어보며 우리나라가 탄소중립시대 에너지산업 강국으로 나갈 수 있는 방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지난 1946년 7월 14일 프랑스 메츠의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참석해 손으로 승리의 V 사인을 보였다. [사진=연합뉴스]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 지난 1946년 7월 14일 프랑스 메츠의 대혁명 기념일 행사에 참석해 손으로 승리의 V 사인을 보였다. [사진=연합뉴스]

[이뉴스투데이 김덕형 기자] 석유산업의 역사는 1859년 미국 철도회사 직원인 에드윈 드레이크가 고래기름 대신 석유를 증류해 등유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흔히 석유는 ‘검은 황금’ 또는 ‘땅속의 진주’라고 불린다. 산업화를 거치면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됐고 세계 경제의 주요 변수로 떠올랐다. 석유를 지배하기 위한 강대국들의 다양한 음모가 전쟁의 원인이 됐고 제3세계 산유국은 고통과 수난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난 1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 3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원유(WTI) 가격은 전날보다 2.7%(2.03달러) 급락한 배럴당 73.82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미국의 원유 재고가 예상과 달리 깜짝 증가했다는 소식이 유가에 하락 압력으로 작용했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지난달 26일로 끝난 한 주간 원유 재고가 전주보다 123만4000배럴 늘어난 4억2191만2000배럴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이는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집계한 전문가들의 예상치인 80만배럴 감소와 다른 큰 폭의 증가세다.

또 지구 반대편 중국의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4개월 연속 침체를 뜻하는 50 이하를 기록하며 국제유가를 끌어내린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이는 중국의 경기가 둔화 조짐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중국 국가 통계국은 지난달 제조업 PMI가 49.2를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2월의 49보다는 높지만 여전히 50 이하에 머물렀다. 50 이하는 경기 위축, 이상은 확장 국면을 의미한다.

원유 가격은 세계 경제대국 미‧중의 경제 상황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여전히 세계 경제를 이끄는 원천이 석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석유가 세계 경제를 이끄는 제2의 황금이라는 사실이 전 세계 대중의 머리에 각인된 최초의 사건은 지난 1953년 8월 이란에서 벌어졌다.

이란의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이란과 영국이 갈등하는 가운데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이란 정부를 전복시켰다. 이 당시 이란은 35대 총리 모하마드 모사데크(1882~1967)가 이끌고 있었다. 그는 이란의 ‘반외세 전통’과 ‘세속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여전히 세계 정치·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석유’

왜 미국은 다른 국가들 사이의 경제 분쟁에 폭력적인 개입을 감행했을까. 그 이유는 모사데크의 석유 국유화가 미‧영 석유카르텔의 세계 석유 자원 지배에 대한 치명적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란 정부가 영국이란석유회사(AIOC)를 국유화한 지 한 달도 안 된 지난 1951년 5월 중순, 미국 석유 메이저의 대표들이 조지 매기 미국 국무부 근동 담당 차관보를 만났다. 이 자리서 이들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란의 석유 국유화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했다. ‘과도한 양보’란 것이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5월 18일 국무부는 성명을 통해 석유 국유화는 이란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 미국 국민은 AIOC에서 철수한 영국인 기술자를 대신해 이란 정부에 협조해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아울러 미국 중소 석유기업의 이란 석유 구매도 금지했다. 이란의 석유산업을 고사시키고 석유 판로 봉쇄에 나선 것이다.

이로써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사실상 실패로 귀결됐다. 영국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와 석유 메이저 기업들이 반대하는 한 이란의 석유 국유화는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미국은 세계 석유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결코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방세계 특히 미국이 석유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석유는 가장 미국적인 상품이며 산업이다. 미국에서 최초로 산업화 됐기 때문이다. 석유산업을 통제하는 시스템도 미국에서 발명됐다.

우리에게 익숙한 존 D. 록펠러(1839~1937)와 그가 세운 스탠다드 석유회사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독점으로 미국 석유산업을 장악했고 미국 최고의 부호가 됐다. 록펠러는 떠났지만 이후 극소수의 공급자가 세계 석유시장을 지배해 온 전통은 이제껏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 석유시장을 손에 넣은 스탠다드 석유회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 대리인을 두고 세계시장을 장악했다. 그리고 187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가격을 대폭 인상해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세계 정치 패권을 가지고 있던 유럽에서 너도나도 대규모 유전 개발에 나섰다. 특히 세계 최대 금융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1883년 파리 지부를 통해 투자에 참여했다. 여기에 동아시아 유통망을 가진 영국 상인 마커스 사무엘과 동인도제도에서 유전을 개발하던 로열더치 등이 1907년 로열더치셸을 출범했다.

네덜란드의 로열더치는 원유을 공급하고 영국 상인 마커스 사무엘의 셸은 유통,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이 자본을 대는 유럽의 거대 석유기업이 탄생한 것이다.

이같은 두 거대 석유회사의 탄생과 더불어 영국 정부가 1913년 영국페르시아석유회사(APOC)의 주식 51%를 인수하면서 국제 석유 업계의 ‘빅3’ 체제가 완성됐다.

◇석유의 가치가 높아지며 ‘중동’은 슬픔에 빠졌다

가장 중요한 점은 영국 정부는 전략적 이유로 석유산업에 진출했다는 것이다. 영국 해군은 1882년부터 기존 석탄 연료 전함보다 석유 연료 전함의 전투 능력이 탁월하다는 데 주목했다.

석유 전함은 연기가 나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었다. 반면 석탄 전함은 연기가 10km(킬로미터)까지 보여 쉽게 적에게 위치가 드러났다.

이러한 이유로 1912년 영국은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 해군 전함을 석유 연료 전함으로 전환했다. 당시 전환 결정을 내린 인물이 바로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1874~1965)이다.

처칠의 판단은 당시 영국 정치권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1차 대전은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을 드러낸 결정적 계기였다. 석유가 1차 대전의 승패를 갈랐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석유 생산지로서 중동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1918년 8월 영국은 러시아의 바쿠유전을 장악했고 3개월 후 독일은 패배했다. 전쟁 당시 연합국에는 영국의 이란 유전 외에도 당시 세계 최대 산유국인 미국이 있었다. 연합국 석유의 80%가 미국에서 공급됐다.

조지 커즌 영국 외무장관은 전쟁이 종료되고 “연합국은 석유를 쏟아부어 승리했다”고 말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석유의 가치를 피부로 체감한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본격적으로 중동 지역 장악에 나섰다. 1916년 5월 영국은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Sykes-Picot Agreement)’을 맺어 중동 지역을 분할했다.

이제 세계 패권과 경제를 장악하려는 강대국들의 욕망에 중동 지역은 분쟁이 끊이지 않으며 정치도 경제도 그들에게 종속돼 버리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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