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 중 국가의 권력 남용에 의한 범죄에 대해 민, 형사상의 시효를 배제하거나 조정하자는 제안이 정가에 후폭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광복절에서 “친일과 항일, 좌우 대립, 독재와 민주세력 간 분열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자”며 국가 차원의 과거사 정리를 본격 제안한 이후 과거사 정리에 대한 의지와 집착을 드려낸 것이다.
특히 노 대통령의 이번 제안에는 시효의 배제. 조정 대상엔 국가 범죄에 따른 배상과 보상 문제도 포함되어 있는 등 과거사법의 문제점까지 지적하며 보다 정교한 보완론이라는 측면에서 향후 정치권에 만만치 않을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보인다.              (편집자 주)
 
노대통령의 구상은 무엇일까
노 대통령은 이날 “더 이상 국가 권력을 남용해 놓고 나 몰라라 하거나 심지어 큰소리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라며 “그래야 국가의 신뢰,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했다. 명분만 보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그 방향이 옳은지, 현실적인지, 그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분열의 핵심인 지역구도를 해소하자며 한나라당에 총리 지명권을 주는 대연정을 제안했다. 내용이 공개될 경우 한국 사회의 지각변동을 가져올 불법 도청 테이프 274개의 공개 여부를 정할 특별법의 제정도 제시했다. 기존의 정치 구도를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파격적 제안들이었다. 특히 테이프 특별법안은 건국 이후 한국 사회의 주류 기득권층의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힐 만한 사안이다.
그래서 25일로 임기 후반기를 맞는 노 대통령이 정치의 역학구도를 완전히 뒤바꿀 ‘노무현식 국가 건설’ 제안을 연쇄적으로 내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역대 대통령들도 ‘신한국 건설’(김영삼) ‘제2의 건국’(김대중) 등의 슬로건을 내세우며 새로운 국가의 건설을 강조한 적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집권 3년째인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처벌하는 5.18 광주 특별법을 위헌. 소급입법 논란 속에 강행, 처리했다. 노 대통령의 이날 제안도 5.18 특별법 때와 견줄 만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 당장 야당의 비판에 직면했다. 건국 이후 모든 국가 기관의 권력 남용 행위가 대상이 될 수 있다. 거기에 재심의 길까지 열어 놓자는 주장이어서 확정 판결을 받은 사안도 논란이 된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권은 물론 심지어 조봉암 사형 사건 등 이승만 정권에서 벌어진 일들도 시빗거리가 될 수 있다. 이와 관련,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이날 낮 “과거사 정리의 큰 원칙을 얘기한 것”이라며 “국가 정보기관의 불법 도청 사건도 시효 배제, 조정 법률의 대상이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김영삼.김대중 정부에서의 불법 도청 사건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나 오후 들어선 “형사적인 시효의 배제, 조정 문제는 논의해 봐야겠지만 원칙적으로는 장래에 관한 것”이라고 톤을 낮췄다. 즉각 위헌 논란이 제기된 대목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특별법이 실제 추진될 경우 부일장학회 헌납 문제 등 과거 박정희 정권 때의 사례도 논란거리가 될 것 같다. 국정원은 지난달 21일 부일장학회 강제 헌납을 확인하며, 부일장학회 후신인 정수장학회의 사회 환원을 거론했었다.
또 미림팀 불법 도청이 포함될 경우 과거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조직적 도청에 대한 단죄도 가능해진다. 노 대통령이 이 같은 특별법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이 주장하는 ‘음모론’도 공세적으로 해소하려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우리당 “통합위해 부족한 점 바로잡는 것”
이 같은 노 대통령의 언급과 관련 열린우리당은 지난 16일 대통령의 발언이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고 진정한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자는 점을 역설한 것이지 헌법을 위반하거나 법체계 안정성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당 정세균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고위정책회의에서 “성급한 위헌시비나 법리논쟁 이전에 말씀의 취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 연구해야 한다”면서 “핵심은 과거사를 제대로 규명하고 진정한 화해와 통합으로 나아가는 데 부족한 점 이 있으면 바로잡자는 것이지 헌법을 위반하자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은영 제1정조위원장도 “중대범죄와 관련해서는 공소시효를 배제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고, “한나라당은 이미 95년에 헌정질서파괴범죄의 시효 배제에 관한 특례법을 정한 바 있다. 내란제 등에 대해서는 시효 배제한다고 해놓고 이제 와서 다른 소리를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반박했다.
 
 한나라 “헌정체제 무시해 국론분열 조장”
그러나 한나라당 강재섭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열린 주요당직자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소급입법에 대해 말했는데, 이는 국가의 헌정체제와 법률체계를 송두리째 무시한 것”이라면서  “국론을 통합하고 분열된 국론을 합치는 방향으로 말해야 하는데 국론을 분열시켰다”고 맹비난 했다.
맹형규 정책위의장은 “대통령은 헌법을 수호하고 준법을 하는 것이 첫 번째 직무인데 끝없이 혼란을 야기하고 헌법질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는 것은 유감”이라고 주장했다.
김기춘 여의도 연구소장도 “소급입법을 금지한 것은 국민의 법적생활 안정을 위한 것”이라며 “대통령이 이걸 훼손한다면 우리 국민은 법적 안정성을 누릴 수 있는 민주사회에서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법률지원단장인 장윤석 의원은 KBS라디오 `안녕하십니까, 김인영입니다'에 출연, “국제사회에서 일고 있는 공소시효 폐지 움직임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말살하는 경우에 제한된다”면서 “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이런 것을 국가권력남용 범죄라는 모호할 수 있는 범죄에 견강부회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이는 자칫 헌법 정신을 말살하는 위헌적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민노·민주 찬성입장 표명
하지만 한나라당의 반대에도 불구 야당인 민노당과 민주당은 찬성입장을 표명하여 이채를 띠었다. 민노당 홍승하 대변인은 논평에서 “국가기관의 반인권 범죄 시효 배제에 대해서는 환영하는 입장”이라며 “여기에 더해 정치와 경제, 언론 간 불법 유착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도 “독일의 경우 나치범죄는 시효가 없다”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제안에 대한 찬성 입장을 밝혔다. 한 대표는 지난 16일 오전 불교방송(BBS) 고운기의 아침저널에 출연 “국가권력에 의해 피해를 본 국민이 있다면 시효에 상관없이 국가가 구제해 줄 의무를 지니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면서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데에 관여한 사람들이 이미 공소시효가 지난 경우에는 그 사실만 밝혀서 국민들에게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경각심을 주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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