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요, 리키'. [사진=영화사 진진]

[이뉴스투데이 여용준 기자] 어느 날, TV 광고. 따뜻한 느낌의 화이트톤 거실에서 베이지색 니트와 바지를 입은 선남선녀가 등장한다. 이들은 예쁘고 잘 생겼지만 어느 광고 전단지에서 봤을 법한 얼굴들이다. 이 남녀와 함께 등장한 두 아이들은 사진관에서 사진 찍을 때 엄마가 시켜서 웃는 것처럼 어색하게 활짝 웃고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족은 집에서 화목한 듯 즐겁다. 아이들은 강아지와 함께 거실을 마음대로 뛰어놀고 아빠는 신문을 본다. 엄마는 입고 있는 옷과 디자인을 맞춘 것 같은 앞치마를 두르고 식탁에서 상을 차린다. 

거실에서 공기청정기는 아이들을 따라 먼지를 잡아내고 주방에서는 음식냄새를 제거한다. 실내온도는 어른과 아이, 강아지가 모두 쾌적함을 느낄 수 있도록 자동으로 제어되고 켜져 있던 TV는 시청자가 없는 것을 알고 자동으로 꺼진다. 

다소 비현실적이고 전형적으로 보이는 이 가족은 가공된 행복을 표현하기 위해 온 몸으로 열연을 펼친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감싸고 있는 홈IoT 시스템이 전면에 등장한다. 이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광고는 아니지만 홈IoT가 적용된 아파트 광고를 표현한 것이다. 

누군가 광고를 본다. 그는 서울 노량진 어딘가 원룸에서 자취하는 청년이다. 좁은 원룸에서 그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보일러 대신 전기장판과 두툼한 솜이불로 몸을 데우며 방금 끓인 라면을 먹는다. 그에게 TV에 등장한 홈IoT 아파트는 남의 이야기다. 거기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이나 허무함을 느끼진 않는다. 처음부터 광고는 남의 이야기이며 그 속의 무언가를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 속도는 더 빨라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어느새 가능해졌고 더 황당했던 상상도 현실이 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더 미래의 과학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현재의 과학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돌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속도를 잠시 늦춰보자는 의미다. 

애비는 남편이 택배기사를 시작하면서 밴을 구매하기 위해 자신의 차를 판다. 자동차조차 없어 대중교통으로 일하러 다니는 그녀에게 과학의 혜택은 가당키나 할까? [사진=영화사 진진]

19일 개봉을 앞둔 영화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의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신작이다. 켄 로치는 저항과 혁명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썼으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야기를 대변한 작가로 유명하다. 가장 최근 개봉했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영국의 복잡한 행정제도와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주인공과 주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의 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맥락을 같이 한다. ‘미안해요, 리키’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시대의 흐름은 과학문명과 의료기술의 발달이다.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 리키(크리스 히친)는 택배기사 일을 시작한다. 그는 주택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여러 일을 전전하다 택배기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리키의 아내 애비(데비 허니우드)의 직업은 간병인이다. 그는 하루 종일 많은 간병 대상자들을 만나며 대화 상대가 돼주고 목욕이나 청소, 식사 등의 일을 돕는다.

영화는 그들의 직업이 택배기사, 간병인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택배기사는 유통구조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늘어난 직업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이를 소화하기 위해 국내에서는 ‘새벽배송’까지 생겨날 정도로 사업이 커지고 있다. 

택배는 아주 편리한 서비스다. 손가락 하나로 물건을 집까지 가져다주며 모바일 앱이나 홈페이지를 통해 물건이 어디쯤 있는지 실시간으로 조회할 수 있다. 이 같은 서비스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택배회사는 기사들과 물류 직원들을 기계적으로 통제할 필요가 있다. 

본 기자는 몇 년 전 군포의 택배물류단지에서 일일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산업용 택배라 컨베이어 벨트의 자동화 시스템은 아니었지만 무게제한이 없어서 엄청나게 무거운 물건이 쉬지 않고 들어왔다. 여기에는 부품이나 장비 외에 쌀, 김치, 감자 등도 포함돼있었다. 이 무거운 것들을 쉴 틈 없이 나르다가 아침을 맞이한 것이 택배물류단지의 일과였다.

비인간적인 물류 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지점을 전국 최대 실적으로 끌어올린 멀로니의 성공비결은 고용된(?) 기사의 안전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 한 태도였다. 택배회사의 시스템 역시 그렇게 발달해있다. [사진=영화사 진진]

이것을 나르는 택배기사도 마찬가지다. 무거운 짐을 차에 실어 가정이나 회사로 배달하면서 쉴 틈이 없다. 물건의 위치는 실시간으로 조회되기 때문이다. 회사는 택배 조회 디바이스를 통해 기사가 접수한 물량을 관리하고 조금이라도 지연되면 알람이 울리도록 근무태도도 관리한다. 

택배 관리 디바이스로 대표되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리키에게는 족쇄와 같은 셈이다. 그리고 정작 리키는 택배로 물건을 구매하지 않는다. 

의료기술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수명을 더 늘어나게 해줬다. 우리는 이전보다 더 오래 살 수 있다. 다만 현재의 의료기술은 과도기에 가깝다. 인간은 이전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지만 ‘아프지 않게’ 오래 산다는 것은 장담할 수 없다. 

현재의 IoT 기술은 혼자 사는 노인들의 건강과 동선관리를 체크한다. IoT 디바이스를 통해 축적된 데이터는 가족이나 사회복지사의 스마트폰으로 전송돼 위기상황에 대응할 수 있고 필요한 것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IoT 기술이 발달해도 움직이고 씻고 밥 먹는 일은 직접 해야 하고 그것이 어렵다면 누군가 도와줘야 한다. 즉 간병인은 의료기술의 발달로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늘어난 직업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경우 간병인을 고용하면 1인당 종일 돌봄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고 노령인구가 더 늘어난다면 영화 속 애비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2시간씩 돌아다니며 돌봄을 해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리키와 애비의 아이들이 성인이 돼 각자의 삶을 찾아 떠나고 리키나 애비 둘 중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다면 남은 한 사람은 간병인을 고용해 돌봄을 받아야 한다. 지금 애비와 리키의 가정을 본다면 나중에 이들이 간병인을 고용하고 택배로 원하는 지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력을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다. 

리키(택배기사)와 애비(간병인)는 과학의 발달로 생겨난 서비스 직업군이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과학기술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지 장담할 순 없다. 적어도 영화에서는 그런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일에 치여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되기 바쁘다. 

부모가 맞벌이를 하며 녹차가 된다는 것은 아이들이 제대로 돌봄을 받기 어렵다는 의미다. 때문에 리키와 애비의 아들 셉(리스 스톤)은 바깥으로 나돌며 문제를 일으키고 딸 리사(케이티 프록터)는 겁이 많은 아이가 됐다. 다만 공통적인 것은 셉과 리사 모두 부모가 가정에 좀 더 오랜 시간을 머물 수 있길 원한다. 

이것은 의식의 흐름과 같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리키와 애비에게 새로운 일을 안겨줬고 그 일 때문에 두 사람은 자녀들과 오랜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결국 기술의 발달이 가족을 갈라놓았다는 의미다. 

영화 속 택배회사의 근무시스템은 꽤 비인간적이다. 기사가 2분 이상 자리를 비우면 알람이 울리고 관리자에게 보고된다. 택배가 정해진 시간 안에 수령인에게 도달하지 못해도 기사는 경고를 받을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은 ‘자영업자’의 형태로 고용돼있다. 회사가 제공하는 복지혜택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설령 혜택이 있더라도 이는 정직원과 차이가 있다.

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준다. 다만 그것이 정말 ‘우리 모두’인지 따져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과학기술 때문에 삶의 여유와 행복을 잃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기술을 위한 기술이 의미가 있을까? 과학기술은 결국 인간을 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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