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대전’ 2막 시작···한국이 정해야 할 ‘새 축’
中 DDR5·낸드 추격, 韓 메모리 우위 흔들 라피더스 27조 투입···日 파운드리 재도전 미국 FDI 빨아들이며 2030 생산지형 재편 법인세 6조 폭증에도 투자막는 규제 병목↑ DDR5·HBM 수요 급증···국내 전략 재설정
[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세계 반도체 지형이 인공지능(AI)을 축으로 재편되는 ‘2막’에 돌입했다. 그동안 한국과 대만 중심으로 고도화되던 구조가 미국·중국·일본까지 뛰어들며 다극화 흐름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다. 메모리 초격차로 탄탄한 우위를 확보해 온 한국으로선 기술, 정책, 공급망 전반에서 새로운 전략적 축(軸)을 선택해야 할 시점이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중국은 가장 빠르게 판도를 흔들고 있다. CXMT가 DDR5·LPDDR5X 실물을 공개하며 성능을 삼성·SK와 사실상 동일 수준으로 끌어올렸고, YMTC는 270단대 낸드로 점유율 13%까지 확대했다. ASML의 EUV 장비 수입이 차단된 상황에서도 국내외 엔지니어 1000명 이상을 영입하며 로드맵 격차를 1년 내외로 줄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 업계 관계자는 “3차원(3D) D램 시대가 오면 EUV 의존도가 낮아져 중국이 더 유리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특히 중국은 D램을 넘어 ‘프리미엄 메모리’ 개발 속도를 높여 시장가격과 수요를 좌우하는 구조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내년 DDR5·LPDDR5X가 본격 양산되면 한국이 주도해 온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강도가 약화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서 거둔 연간 87조원 매출에도 중장기 리스크가 늘어난 셈이다.
일본도 사라졌던 존재감을 되찾기 위해 총력전에 나서고 있다. 정부와 도요타·소니·키옥시아 등이 참여한 라피더스는 올해만 11조원을 추가 지원받으며 누적 27조원이 투입됐다. 2027년 2nm 양산, 이후 1.4nm까지 목표를 제시한 라피더스는 파운드리 시장에서 삼성·TSMC를 정면 겨냥하고 있다. 일본이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제조 패권을 다시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일본의 재건 드라이브는 산업·안보 전략과 직결돼 있다는 해석이다. 팬데믹과 미·중 갈등 속 반도체 공급망이 흔들린 뒤 일본 정부는 규제 완화, 세제 지원, 채무보증까지 도입했다. 라피더스 성공 시 일본 소부장 기업은 한국·대만을 거치지 않고 완제품 기업과 바로 연결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다만 시장에서는 “일본 기술력이 한국·대만보다 20년 뒤처진 만큼 양산 전환 과정에서 ‘죽음의 계곡’을 넘는 게 관건”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미국도 사실상 이번 재편의 중심축으로 부상했다. 한국·대만·일본의 FDI를 빨아들이며 제조 부활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의 대미 투자만 코로나 이전 대비 30배 증가했고, 대만은 1000배 이상 급증했다. 이 흐름이 지속되면 미국은 2030년대 초 글로벌 첨단 반도체 생산의 2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된다. 미국·유럽·일본을 합친 생산 비중은 10%에서 30% 이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대만은 미국과의 공급망 협상에서 한층 적극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미국은 관세 인하 조건으로 4000억달러 투자 약속을 요구, 대만은 TSMC의 1650억달러 미국 투자에 더해 ‘대만식 과학단지’ 모델을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대만 정부는 이미 물·전력·인력·세제를 패키지로 지원하며 반도체가 국가 경제 전체를 끌어올리는 구조를 만들었다. 2021년 가뭄 때 농업용수를 TSMC로 돌린 사례는 대만 산업정책 우선순위를 상징한다.
미국 중국 규제는 예측 불가능성을 더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엔비디아 H200의 중국 판매 허용을 검토 중인데, 이는 그동안의 AI칩 수출 통제 기조와 상반된다. H200은 HBM3E가 처음 탑재된 모델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엔 직접적인 수요 확대 요인이다. 미국이 반도체 관세 부과를 미루는 것도 자국 빅테크의 비용 폭등을 우려한 결정으로 풀이된다.
이 격변기 속에서 한국의 대응은 상대적으로 느리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반도체특별법 통과 실패, 52시간 근로 시간 유연화 논쟁, 금산분리 규제 등 핵심 제도가 산업 현실을 좇지 못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장치산업이라 타이밍이 생명인데 규제로 시간만 잃고 있다”고 토로한다. 실제 한국으로 투자하는 글로벌 제조 기업은 제한적이며, 투자 여력에도 법·제도 병목이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반도체 기업의 중요성과 기여도는 이미 수치로 증명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에만 6조원을 넘는 법인세를 내며 전년 대비 9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국내 대기업 339곳의 영업이익 증가분 중 절반 이상이 두 기업에서 나왔을 만큼 반도체 업종은 사실상 한국 세수의 핵심 축이 됐다.
문제는 이런 ‘세수 쏠림 구조’가 글로벌 반도체 투자 경쟁이 격화되는 시점에 국내 기업의 재투자 여력을 제약할 수 있다는 점이다. 미국·일본·대만은 수백조원대 보조금·세제 혜택·인프라 패키지를 총동원하며 자국 기업의 투자 속도를 끌어올리고 있지만, 한국은 반도체특별법 좌초와 금산분리 규제 등 제도적 장벽으로 대응 속도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크다.
업계에선 “세수는 늘지만 투자 여력은 줄고, 글로벌 경쟁은 더 빨라지는 구조”라며 “정부가 세제·자본조달 환경을 근본적으로 손보지 않으면 AI·메모리 초격차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경고가 나온다.
하지만 글로벌은 이미 국가 정책을 총동원해 ‘반도체 국가 전략’을 재설계하고 있다. 중국은 수십 년째 반도체 대기금을 통해 수백조원을 투입, 일본은 채무보증까지 허용했다. 미국은 법·보조금·관세를 전략적으로 결합한 공급망 재편을 주도하고, 대만은 외교·투자·산업정책을 일원화해 미국과 긴밀히 움직이고 있다. 반면 한국은 정치적 프레임 속에서 핵심 법안조차 통과시키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지금 글로벌 반도체 전장은 단순한 기술 우열을 넘어 국가가 어떤 질서와 규칙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며 “중국은 속도로, 미국은 제도로, 일본은 복원력으로 각자의 해법을 내놓는 사이 한국은 여전히 과거의 프레임에 발목이 잡혀 있다”고 말했다.
이어 “메모리 한 축만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만큼, 이제는 산업 전체를 어떤 구조로 다시 짤 것인지에 대한 ‘국가적 판단’이 필요하다”며 “초격차의 유지 여부는 기술 자체보다, 그 기술을 어디에 배치하고 어떤 동맹과 정책으로 뒷받침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관측했다. 그러면서 “한국이 선택을 미루는 사이 세계는 이미 다음 라운드로 넘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