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방’ 주도권은 누구에게···‘성분명’ 전쟁, 韓 의료를 흔들다
‘처방권·책임·재정’ 얽힌 직역 충돌 재점화 반대 47.5%·동의 76% ‘약 변경 불신’ 확대 약국 중심 이동···제약 영업망 재편 불가피 ‘국민선택분업’ vs ‘성분명 확대’ 대안 충돌
[이뉴스투데이 김진영 기자] 성분명 처방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한국 의료체계를 뒤흔들고 있다. 국회에 관련 법안이 발의되자 의료계는 즉각 집단행동에 나섰고, 약계는 약제비 절감과 수급 안정이라는 명분으로 대응하며 양측의 대립이 정면충돌 구도로 재편되고 있는 양상이다. 표면적으로는 ‘이권 다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처방권과 책임 구조, 제네릭 신뢰성, 영업 관행, 의료재정 등 복합 의제가 얽힌 구조적 문제라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대한병원의사협의회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47.5%가 성분명 처방에 반대한다고 답했지만, 제네릭 효능 자체에는 66%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등 국민 인식이 엇갈린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 동의 없이 약을 바꾸면 안 된다’는 응답도 76%에 달해 약물 선택 과정의 투명성에 대한 요구도 뚜렷한 것으로 관측된다.
의료계가 문제 삼는 지점은 ‘책임 없는 선택권 확대’다. 동일 성분이라도 제형·부형제·흡수 속도 차이에 따라 환자 반응이 달라질 수 있는데, 약사가 선택한 제품에서 부작용이 발생해도 법적 책임은 의사가 지는 구조가 유지된다. 생동성 기준이 높아졌다고 해도 제네릭 간 품질 편차에 대한 불신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처방권이 흔들리면 환자 안전과 진료 신뢰가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약계는 성분명 처방을 약제비 절감과 공공성 강화 차원의 제도 개선으로 규정, 대응을 확대하고 있다. 정부 용역 결과에서 최대 7조원의 비용 절감 효과가 제시되자 약사회는 홍보 영상·자료집·토론회 등을 통해 여론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약국 재고 상황을 반영한 조제 유연성, 저가 제네릭 사용 확대, 폐의약품 감소 등 소비자 편익을 앞세우며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기조다.
노수진 약사회 홍보이사는 “성분명 처방은 약사 이익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국민에게 이로운 제도”라며 “의사-약사 간 밥그릇 갈등으로 비치기 시작하면 국민적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말했다.
제약업계의 계산법도 복잡해졌다. 성분명 처방이 일반화되면 의사가 아닌 약사에게 의약품 선택권이 커지면서 영업 구조가 대대적으로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병의원을 중심으로 해오던 홍보·판촉이 약국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고, 이에 위탁 영업(CSO) 활용이나 영업망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리베이트 축이 의사에서 약사로 이동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시장 투명성을 높일 계기라는 평가와 함께, 영업 관행이 새로운 형태로 재편될 가능성 역시 배제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의사에서 약사로 리베이트가 옮겨갈 가능성도 있다”며 “리베이트는 제도나 규제가 부족해서 생긴 문제가 아닌 받는 사람 의지 문제”라고 말했다.
다만 이번 대립이 갑작스레 불거진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성분명 처방 논쟁은 1990년대 후반 약품비 절감 논의에서 출발한 뒤 2000년 의약분업 과정에서 대체조제 규제로 사실상 멈춰 있었다. 2006년 생동성 시험 자료 조작 사건으로 제네릭 신뢰가 흔들렸고, 코로나19 시기 필수약 품절이 반복되며 ‘수급 안정’ 요구가 다시 떠올랐다. 기준 강화에도 불신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점이 현재 갈등의 배경으로 남아 있다.
정책 대안 논의도 분화되고 있다. 의료계는 성분명 처방 대신 ‘국민선택분업’을 제안하며, 환자가 원하면 병의원에서 직접 조제를 받을 수 있도록 선택권을 넓히자고 주장한다. 고령층 등 의료기관 접근이 어려운 환자들의 편의를 높일 수 있다는 논거다.
반면 약계는 대체조제 절차 간소화와 성분명 확대가 약가 절감과 수급 안정에 가장 현실적인 해법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도 필수의약품 공급난을 계기로 제도 도입을 검토하고 있지만, 의무화 범위와 책임 배분 등 핵심 쟁점은 여전히 정리되지 않고 있다.
성분명 처방 논쟁은 제네릭 신뢰성, 직역 권한, 유통 구조, 의료비 지출 등 누적된 쟁점이 한꺼번에 드러난 결과로 해석된다. 국회 논의 과정에서 의무화 범위가 축소되거나 시범사업으로 조정될 가능성도 거론되지만, 논쟁의 본질은 특정 법안의 처리 여부를 넘어 의료체계 전반의 분업 구조와 책임 배분을 다시 설계하는 문제로 확장되고 있다.
김택우 의협회장은 “수급 불안정 의약품 문제는 본래 국가가 책임져야 할 사안”이라며 “정부가 그 책임은 외면한 채 수급 불안을 명분으로 성분명 처방을 강제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지금 국회와 정부가 추진하는 성분명 처방은 지난 20여 년간 유지돼 온 의약분업의 원칙을 사실상 흔드는 조치”라며 “성분명 처방을 강행한다는 것은 곧 의약분업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정부와 국회가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