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림 칼럼] 트럼프보다 더 위험한 건, 그를 다시 택한 Americans
1990년대초, 한국 자동차는 미국 시장에서 연간 40~50만대를 수출하며 약 3%의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반면, 미국 자동차의 한국 내 판매는 고작 1500대 수준에 불과했다. 이에 미국 자동차 업계는 한국이 비관세 장벽으로 자국산 수입을 막는다며, ‘슈퍼 301조’ 적용을 들이대고 한국 정부에 시장 개방을 강하게 압박했다.
당시 한국 시장은 연간 150만대 규모였으며, 현대·기아·대우 등 국내 3사는 내수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 중이었다. 특히 설립된 지 20년 남짓한 현대차에게 대미 수출은 성장을 위한 필사적인 돌파구였다.
그 당시 미국의 ‘슈퍼 301조’ 위협은, 오늘날 트럼프 대통령이 휘두르는 ‘관세 폭탄’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수입차 규제가 과도하지 않았음에도, 미국차는 팔리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이 개방될수록 BMW, 벤츠 등 독일차의 점유율이 급등한 반면 미국차의 존재감은 더욱 미미해졌다.
결국 팔리지 않은 건 ‘외제차’가 아니라 ‘미국차’였고, 이는 시장의 냉정한 평가였다.
그러나 미국 자동차 업계는 자국 제품의 경쟁력 강화를 외면한 채, 그 책임을 외부에 돌렸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현지 생산’이라는 우회 전략으로 대응했고, 오늘날 도요타·혼다·닛산은 미국에서 연간 300만 대 이상을 생산하며, 현대차 역시 조지아와 앨라배마에서 연간 71만 대를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전략 덕분에 한·일 자동차 기업은 ‘슈퍼 301조’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미국의 ‘빅3’는 노동조합(UAW)의 상습적인 파업과 내부 경쟁력 저하로 2005년경 몰락의 길을 걸었다.
30년 전 미국 자동차산업은 구조조정 같은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외면하고, 외부 압박으로 문제를 풀려다 ‘자동차 종주국’이라는 위상마저 잃고 말았다. 지금 트럼프가 추진하는 보호무역주의 역시 이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
트럼프는 ‘위대한 미국’을 외치며 관세라는 무기를 무차별적으로 휘두르지만, 이는 자유무역 질서의 훼손과 세계 경제의 신뢰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상대가 보복관세로 맞서 상호 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되면 결국엔, 지구촌이 공멸의 도가니에 빠지고 말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GDP 성장이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반이 외국 자본과 수입 의존에 머문다면, 이는 일시적 처방에 불과하며. 결국 미국 경제는 ‘속 빈 강정’처럼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FTA마저 일방적으로 뒤엎는 트럼프식 접근은 미국의 신뢰를 근본부터 흔들고, 오랜 동맹국들마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책임을 트럼프 개인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더 큰 책임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면서도 다시금 그를 선택한 미국 국민, 바로 ‘American’에게 있다.
이 선택은 미국을 다시금 디트로이트의 자동차산업처럼 쇠퇴의 길로 이끌 위험이 크다. 그리고 그 대가는 단지 산업의 몰락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후퇴, 국제 질서의 혼란, 동맹의 균열 등 훨씬 더 큰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다.
한때, 하늘을 가르며 세계를 이끌던 독수리처럼 강인하고, 옳고 그름이 분명했던 미국은 이제 흐릿한 눈, 무뎌진 부리와 발톱을 지닌 채, 문을 닫고 웅크린 늙은 독수리처럼 보인다. 자신만의 먹이를 지키려는 심술궂은 모습 말이다.
그러나 이 추락을 멈출 수 있는 힘은 트럼프가 아니라, 다시 깨어나는 미국 시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