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대미를 장식했던 한 드라마의 흥행은 추억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한 체온을 대중이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준 것은 아니었을까? 드라마 방영이후 감각적인 최신 곡들을 밀어내고 노래방에서 10대들의 마음까지 점령해버린 드라마 OST 속 많은 옛 노래들이 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1988년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20년 후엔 2016년을 그리워할 수 있을까? 그 때만큼 그리워할 사람냄새가 남아있을까? 오랜 시간 최고의 자리에서 대중을 울리고 웃게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그 자리를 지킬만한 자타공인 최고의 아티스트들을 만나 그 해답을 찾아본다.

Talk? Talk!

윤일상 작곡가 <사진=김석구 기자>

"요즘엔 사람들이 음악에 집중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음악자체가 너무 자극적이지 않고 단순히 반복이 되면서 별로 내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 않는 그런 음악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런 음악들이 발전을 해왔죠. 후크송도 그런 음악 중 하나죠"

"음악은 감성을 건드리는 거고 사람과의 대화죠. 최종 프로덕션을 대중과 커뮤니케이션 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해요"

 

윤일상은?
윤일상 작곡가는 지금까지 700여곡의 곡을 작곡했다. 19세 나이에 프로 작곡가로 데뷔해 96년 97년, 2년 연속 최고 작곡가상을 받았고 2000년 최근 10년 넘버원 최다히트 작곡가로 선정. DJ DOC 3집으로 밀리언셀러 기록을 남긴 최고 댄스곡 작곡가에서 이은미의 <애인 있어요> 김범수의 <보고 싶다> 등의 최고 발라드 작곡가의 명예까지 거머쥐게 됐다. 2007년에 신세대 작곡가상을 받는가 하면 끊임없는 음악적 시도와 변신을 거듭해오며 뮤지컬 서편제를 통해 2010년 제 1회 예그린 뮤직어워즈 작곡상에 이어 2014년 제 8회 더 뮤지컬 어워즈에서도 작곡상을 수상했다. 

윤일상 작곡가 <사진=김석구 기자>

Q: 방송에선 독설가로 통하시는데 아내와의 일상은 어떠세요?   
A: 3층에 꾸며 놓은 작은 극장에서 예전 뮤직비디오들을 보기도 하고 아내와 LP Bar에 가서 음악도 신청해서 듣기도 해요. 시간이 날 때면 주로 아내와 보내는 편입니다.

Q: 아내와의 남다른 일상을 꼽는다면?  
A: 요즘은 미용실을 안 간다는 것. 아내가 머리를 직접 잘라줘요. 사실 저 같은 경우 미용이 필요한 인물도 아니고. 인기 연예인도 아니고 깔끔하게 하면 되죠. 

Q: 돈도 많이 버시는데 너무 아끼시는 것 아닌가요?
A: (웃음) 엔터테이너가 하는 행위를 자꾸 하게 되면 작곡가로서의 내 생활에도 지장이 있어요. 요즘은 방해받기 싫어서 매니저도 없이 제가 직접 운전해서 다니는걸요. 

Q: 힘들지 않으세요?
A: 힘들죠. 얼마 전엔 밤샘 작업을 하고 너무 피곤해서 대리를 불렀어요. (웃음) 
Q: 술도 안 드시고 대리기사님을 부르셨으니 대리기사님도 당황하셨겠어요?
A: 좀 그러셨던 것 같아요. 올 때도 또 불러달라고 번호를 주시더라구요. 팬이었다면서요. 팬이‘었다고 해서’ 마음이 좀 상했습니다 (웃음) 

Q: 요즘 윤일상씨를 제일 기쁘게 하는 건 뭘까요? 
A: 요즘 딸내미 때문에 죽겠어요. 너무 이뻐서...
Q: 아드님이 더 생글생글 잘 웃던데요
A: 아들은 뭐... (웃음) 아들은 그냥 듬직하구... (웃음) 벌써부터 딸 아들 나뉘는 것 같아요. (웃음)
Q: 사진 한 장에 결혼을 결심한 것도 재밌는데 그보다 더 재밌는 사실이 있어요. 독신주의자가 그것도 남자가 아이 이름을 지어 놓았더란 말이죠. 진짜 그러셨어요? 
A: 참 이상하죠? 독신주의였지만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선율이의 이름은 결혼전부터 이미 지어놓고 있었죠. 처음엔 멜로디로 할까 하다가 한글로 같은 의미 인 선율이 좋겠다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결혼을 했고 결혼 초창기부터 말해 놨었죠. 아이를 낳으면 아들이든 딸이든 선율이라 이름 짓자고... 그리고 둘째 이름은 아내가 도레미파솔라시의 ‘시’도 되고, 가사란 의미의‘시’도 되는‘시’자를 담아 ‘시율’이 어때 해서 아이들의 이름을 지었죠.

Q: 아빠의 재능을 많이 닮은 친구 있나요?
A: 아들이 그래요. 아들이 눈만 뜨면 피아노를 쳐요. 50일째쯤 되던 때였어요. 선율이에게 바이올린 콘체르토 이마이너 이악장인가... 그걸 들려줬는데 약간 감정이 고조되는 부분에서 선율이가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우연이겠지... 했는데 몇 번이고 들려주면 몇 번이고 그 부분에서 울더라구요. 선율이가 감성적이고 예민하더라구요. 그 때 생각했죠. ‘너도 참 평생 피곤하게 살겠다.’ 

Q: 한때는 독신주의자셨는데 윤일상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요? 
A: 가정은 내게 또 다른 음악이예요. 내게 모든 것의 우선이 음악이었고 인간이 음악이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 내 삶에 빅뱅이 일어난 거죠. 내 자신보다 사랑한 음악인데 이젠 그 음악보다 가정이 우선이 되었어요. 누가 음악과 가정 둘 중 하나를 선택 하라면 생각할 것 없이 가정이죠.

Q: 요즘 ‘위키드’ 잘 보고 있습니다. 방송 내내 아빠미소가 떠나질 않으시던데요. 
A: 아이들 너무 귀엽죠. 제 뒤에 와서 막 찌르고 도망가고... 웃음이 떠날 새가 없어요. 
Q: 테크닉 하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게 하는 걸까요?  
A: 일반 가수들도 마찬가지죠. 처음 듣는 곡에 감정이입을 잘 하는 친구들이 히트를 내게 되죠. 의심할 줄 모르는 진정성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감동을 줄 수 밖에요. 제가 곡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예요. 히트된 곡들 중에 히트를 내려고 만든 노래는 단 한 곡도 없어요. 

Q: 아이들이 애답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는데 어떠세요?
A: 그건 어른들의 시선으로 보는 어른들 생각이죠. 마치 어른들이 아이들의 정수리밖에 못 보고 얘기하는 것과 같죠. 아무리 애답지 않은 아이도 순수한 어른보다 순수해요. 아이들의 그런 무대가 많은 사람들을 힐링 시켜줄 겁니다.  

Q: 평소 동요에도 관심이 있으셨어요?
A: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동요 악상이 떠오르더라구요. 언젠가 곡들이 쌓이면 세상에 내 보내야겠다 생각하고 있던 차에 ‘위키드’에서 섭외연락이 왔어요. 잘 됐다 싶었죠.
사실 혼자 동요뿐만 아니라 동화관련 분들까지 만나보며 동요제작을 생각해왔거든요. 위키드를 통해서 동요시장이 살아났으면 합니다.

Q: 윤일상씨는 어린 시절 어떤 소년이었나요? 동요대회도 나가고 하셨나요?
A: 어머니는 피아노학원을 하셨고 아버지는 늘 바쁘셨어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던 걸로 기억 되요. 하지만 친구들과 있을 땐 잘 어울리기도 했는데 좀 튀는 친구였던 것 같아요.

Q: 어떻게 튀는 친구였는지 에피소드 하나 소개해 주세요.
A: 한 친구의 얘기에 의하면 고1, 2때 친구들에게 데모테이프를 나눠주면서 제가 친구들에게 가사를 써와보라고 했대요. 괜찮으면 내가 쓸게. 했다는 거예요. 그리고 웃긴 건 맘에 안 들면 보는 앞에서 찢어버리는 퍼포먼스까지 했다는데 사실 전 기억이 안나요. (웃음) 좀 독특했던 건 분명한 것 같아요. 

Q: 그 때부터 독설을 하셨던 건가요?
A: (웃음) 글쎄요.

Q: 솔직히 부모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서울 와서 혼자 많이 우셨죠?  
A: 저요? 거의 울어본 적이 없어요. 
Q: 정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A: 초창기엔 50원이 없어서 못나갔던 시절이 대부분이었어요. 형들이 와야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영양실조로 응급실에 실려 가도 그 시절이 참 행복했어요. 그 당시 제게 내일이란 더 이상 나빠질 게 있을 수 없었으니까요. 19살 20살 새벽에 신문 돌리러 나가면 너무나 추웠지만 내일만은 정말 밝겠다. 확신할 수 있었죠.
Q: 인내의 시간이 끝나는 전환점이 있었을 것 같아요.
A: 그 땐 컴퓨터 음악자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어요. 스스로 노력해서 어깨너머로 배울 수 밖에 없었는데 한 3개월이 지나면서 첨엔 청소나 하라던 형들이 내게 물어보는 것들이 생기고 형들 악기세팅도 해주러 다니는 일이 많아져갔죠.

  88년도 89년도에는 다양한 장르가 뒤섞여 서로 1위를 차지하던 시대였다. 국가적으로는 올림픽을 치르고 해외여행이 자유화되는 시기였다. 음악적으로도 변진섭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신승훈 발라드는 솔리드의 <이 밤을 끝을 잡고> R&B발라드에게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 후로 지금까지 발라드의 자리를 R&B발라드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발라드에도 리듬을 쪼개며 춤을 추기 시작했던 솔리드가 나타나 사람들의 마음을 얼르고 뺨치기 바로 전 90년대 초, 신촌에 처음으로 ‘컴퓨터뮤직학원’이란 간판이 걸렸고 90년대 ‘X세대’들이나 가는 특별한 곳 대접을 받았다. 
  여기서 재밌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도 컴퓨터뮤직을 다 알지 못하고 가르쳤고 그 당시 나이 드신 부모님 세대들은 컴퓨터에서 음악이 저절로 나오는 것 즈음으로 알아서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니 스스로 공부를 해야 했다는 윤일상의 말이 맞는 말이었다.

윤일상 작곡가 <사진=김석구 기자>

Q: 외삼촌이 유명한 음악감독(드라마 ‘모레시계’ 최경식 음악감독)인데 전혀 도와 주시지 않았나봐요.
A: 외삼촌은 제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으셨어요. 오히려 자주 외삼촌 녹음실에 오시던 선배님께서 한 제작자 분을 소개해주셔서 그 분과 프로 작곡가로 계약이란 걸 처음 하게 되었어요.
Q: 여쭤봐도 될까요? 첫 계약금으로 얼마 받으셨어요?
A: 깜짝 놀랐죠. 어쩌면 곡을 발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만났을 뿐인데 1000만원에 계약하자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도 너무 과하다 싶어서 함께 일하는 형도 계약하는 걸로 하겠다고 말씀드렸죠.   

Q: 그 후로는 줄곧 고속도로를 달리셨을 것 같은데 포기하고 싶었던 적 있으세요?
A: 정말 포기하고 싶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서편제 음악을 만들며 처음 느꼈어요. 모든 캐릭터를 느끼고 그 느꼈던 감정을 담아 모든 캐릭터의 음악을 만들다 보니까 너무 힘들었어요. 특히 송화 같은 경우 내 얘기 같기도 하고... 사실 밥 한술 뜰 힘이 없었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Q: 그런데 작업하시는 방식을 보면 많은 분들과의 협업도 많이 하세요.
A: 게임 ‘라키아’의 OST에서 락커 윤도현과 소프라노 김소현의 크로스오버듀엣 이나 남경주와 드렁큰 타이거의 크로스오버 듀엣이 좀 새로웠었죠.

Q: 최고의 가수들이 함께 해준 21주년 기념 앨범 얘기를 안 할 수가 없겠죠.
10cm가 부른 <애상> 린이 부른 <정> 이은미가 부른 <Steal away>을 비롯한 모  든 곡들이 어느 한 곡도 아쉬운 곡이 없어보였는데요. 21주년 기념앨범 준비 오래 하셨나 봐요?  
A: 아니요. 평소 워낙 잘 알고 있는 친구들이라 자연스럽게 자발적으로 준비된 기념앨범이예요. 린이 부른 <정>이 너무 좋다고 하셨는데요. 린 같은 경우도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만나 “오빠 기념앨범 준비 하신다면서요 저도 할게요”해서 하게 되었어요.

Q: 이 앨범이 8주 정도 계속 1위를 했죠?  
A: 누구에게 뭐가 어울리는지 누가 뭘 잘 하는지 알고 있으니 편곡도 자연스럽게 잘 나왔고 ... 좋은 친구들 덕분에 좋은 앨범이 완성됐죠. 대중들도 알아보신것 같아요.  

Q: 아직도 목마르세요? 
A: 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도전하고 시도하고 싶어요. 올 해 영화 하나, 애니메이션도 두 개 정도 할 예정 이예요. 그리고 디제잉은 작년에 데뷔해서 올해도 계속 할거고...
Q: 디제잉요? 디제잉도 직접 하세요?
A: 네. 디제잉 공부한지는 오래 됐어요. 한 7년 정도. 음악은 내게 삶 자체예요. 난 다양한 삶을 살고 싶어요. 해볼 수 있는 음악은 다 해보고 싶어요. 그렇게 즐겁게 살고 싶네요.
  
Q: 그렇게 많은 일을 준비하시는데 누군가 도울 사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요즘 작업트렌드가 공동작업을 많이 하는데 필요성 못 느끼세요?
A: ‘컬러피플’이란 팀을 만들어도 봤는데 제 색깔이 강해서인지 혼자 해온 습관 때문인지 좋은 성과가 없더군요.  

Q: 요즘 작곡 팀의 공동작업이 날로 디테일하게 분업화되고 있는데 예를 들자면 누구는 코드 진행만, 또 누구는 멜로디만 작업하는 등의 공동작업 형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A: 글쎄요. 그렇게 작업해서 오래가는 작품이 나온다면 10년 20년 짜리 음악이 나온다면 제가 더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론적으로 그럴 수가 없지 않을까요? 음악은 감성을 건드리는 거고, 사람과의 대화잖아요 다시 말해서 작사가와 나, 가수와 나, 수많은 스텝들의 영혼이 담긴 최종 프로덕션을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작업인데...  연속성은 없지 않을까요? 

윤일상 작곡가 <사진=김석구 기자>

Q: 예나 지금이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A: 기본적으로 감성이 기본이 되어야한다 생각해요. 예전에 사람들이 제 댄스곡을 듣고 무슨 댄스곡이 이렇게 슬프게 느껴지냐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러기위해서 발라드로 곡을 써서 댄스로 바꾸기도 하구요, 쿨 같은 경우 순수함을 표현 하려 노력했죠. 분노를 제외한 모든 감정이 노래에 담기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Q: 주현미씨 사랑한다가 조피디와 만드신 프로젝트앨범 PDIS에 담겼는데 장르불문하고 느껴지시는 감성대로 곡을 만드시나?
A: 그럼요. 어떤 장르를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표현하려는 감정이 잘 담겨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Q: 요즘 대중들을 위해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보시나요?
A: 있다고 봅니다. 플레이어들이나 작곡가들이 해야 할 일들이겠죠.  취미를 묻는 질문에 음악 감상 이란 대답이 1위였던 게 어제 같은데 요즘은 그런 대답을 들어 볼 수가 없어요. 우리 생활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죠. 

이젠 더 이상 사람들이 음악에 집중할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음악자체가 너무 자극적이면 안 되고 단순히 반복이 되면서 별로 내가 하는 일에 지장을 주지않는 그런 음악이 필요했죠. 그래서 그런 음악들이 발전을 해왔죠. 후크송도 그런 음악의 하나예요.

예전엔 레코드샵 앞에서 가던 길을 멈추고 서서듣던 음악들이 있었어요, 버스도 몇 대 지나쳐보내고 했던 추억들이 있었다구요. 그런 음악들을 다시 제작해야 해요. 대중들에게 너무 한 쪽 음악을 바란다는 음악계의 목소리는 책임감 없는 음악계 사람들의 변명이 아닐까 싶어요. 총체적인 문제죠. 전 세계적인 문제로도 보여져요. 

Q: 요즘 밴드 'YAD' 결성하셨어요. 재밌으세요?
A: 네. 고등학교 때 생각도 나고 너무 즐거워요. 그 땐 락 위주로 스모크 온 더 워터, 원드풀 투나잇 같은 노래를 연주했죠. 그땐 제가 노래도 불렀었죠. 아무래도 여학생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맘이 컸던 것 같아요.(웃음)
    
Q: 프로페셔널 음악인을 꿈꾸는 친구들 중에서도 밴드음악을 모르는 친구들이 많은데 밴드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세요?
A: 그럼요. 밴드를 모르면 음악의 베이식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보통은 연주자가 드럼을 연주하면 엠비언스로 녹음을 하게 되는데 한 친구가 드럼을 컴퓨터로만 접하다보니까 실제 드러머를 불러다놓고 킥만 스네어만 따로 쳐달라고 했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꽤 전 이야기니 지금은 오죽하겠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컴퓨터 음악 세대를 폄하하고 싶지 않지만 베이식적인 부분을 공부하지 않는 것은 음악인으로서 자질의 문제가 있지 않나싶습니다. 프로페셔널로 일을 한다면 일반 대중보다는 식견이 훨씬 높아야겠죠. 특히 악기편성에 관해 기본적인 4밴드 정도의 편성도 모르고 작업한다는 것은 모순이라 생각해요.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혼자서도 완성된 하나의 음악을 만든다는 컴퓨터 음악의 개념이 생기기 전엔 음악을 하면 밴드부터 시작했다. 김종서나 임재범처럼 밴드 보컬로 혹은 신대철이나 김태원처럼 악기연주로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함께 합주를 하며 개인의 실력을 키우고 팀의 호흡을 배우고 공연의 무대 매너를 배우며 음악활동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음악을 시작했던 사람들에겐 편집 개념의 음악이 아닌 서로의 악기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자기를 절제할 줄 아는 ‘콜 앤 리스펀스’하는 하모니를 이루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배려하고 함께 하는 동료와 우리 공연을 봐주는 관객과의 관계가 중요했으며 관계 속에서 기쁨과 성취감을 느끼며 음악하는 기쁨을 찾았다.

Q: 힘들 때 듣는 음악 있으세요?
A: ‘앙드레 가뇽’ 음악을 많이 들어요. 머리가 복잡할 때 18번을 부르듯 듣죠. 익숙하니까 마치 오랜 친구와 소주 한 잔 하듯이 만난다 큰 컵에다 소주 한잔 따라놓고 말이죠. 

Q: 그렇게 글라스로 술을 드셔보신 적은 있으세요?
A: 작업할 때도 컵에 소주를 따라놓고 홀짝 홀짝 마시면서 할 때도 있어요. 편곡을 할 때 계속 상승되는 기분을 느낄 필요가 있거든요. 
Q: 옛 시인들이 떠오르는데요. 술 한 잔을 마셔야 시가 써지던... 
A: 그런데 너무 많이 먹으면 다음 날 다시 작업해야 해요.(웃음)

윤일상 작곡가 <사진=김석구 기자>

Q: 왜 윤일상씨의 노래를 많은 분들이 좋아할까요? 운이 좋은 걸까요?
이: 이렇게 만들면 히트하겠다. 히트 공식을 예측해서 곡을 쓰지는 않아요. 하지만 멤버들의 성격 색깔 능력 장점을 본능적으로 캐치해서 그의 매력이 극대화 될수 있도록 만드는 거죠. 그 가수가 그 노래를 불렀을 때 좋을 수밖에 없겠죠. 

Q: 일일이 개성이 다른 가수들의 캐릭터 하나하나를 다 살려 내신다는 게 천재적이라 느껴지네요.
A: 그게 작곡가가 하는 일이예요. 히트를 생각하면 히트랑 멀어지고 사람을 생각하면 더 어울리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히트가 되더라구요. 왜 철없던 시절이 없었겠어요. 격고 나니까 노래 음악은 커뮤니케이션이구나 하는 것을 아는 거죠.

Q: 지난 20년 윤일상이 대중에게 준 것은 무엇일까요?
A: 노래방 18번.(웃음) <애인 있어요>, <보고 싶다> 뿐 아니라 저도 잊고 있던 노래들을 얘기해주실 때 참 기쁘죠.

Q: 그러고 보면 음악에 감동하는 건 남녀노소가 따로 없는 것 같아요. 많은 대중들이 사람에게서 공감 받지 못하는 부분을 음악을 들으며 공감 받잖아요. 내 마음을 알아주는 노래들을 만나죠. 
A: 음악은 사실 제가 만들었지만 각자의 스토리 각자의 음악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곡을 해석하거나 평론가가 곡을 평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각자 감정 각자 스토리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니까요

Q: 앞으로 대중들은 어떤 윤일상과 함께 하게 될까요
A: 자동차 후진할 때 나오던 <엘리제를 위하여>를 듣는 순간 “나도 저런 음악을 하고 싶다.”생각했어요. <엘리제를 위하여>처럼 몇백년이 지나서도 내 음악이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만든 내 이름은 잊혀지더라도 누구나 알고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활용되고 있는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Q: 한 시대의 음악을 이끌어 가시는 입장에서 대중에게 바라시는 점이 있을까요?
A: 여러 가지 음식을 먹어야 건강하듯 다양한 음악을 접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라. 스트리밍 차트... 이통사 벨소리차트에서 이어진 아무 의미 없는 그것에 억매이지 말고 좋아하는 앨범 자체를 듣거나 인디음악 뮤지션들의 음악을 찾아듣다 보면 무뎌진 삶에 휴가를 주는 것이 될 것이다. 점심시간 음악을 통해 다른 곳으로 떠나보시길 바랍니다. 

 

기획/글 김태희
고려대 언론대학원 방송전공 석사.
1995년 ‘페이지’ 객원싱어. 
1993년부터 작사가로 활동. 김종국<별 바람 햇살 그리고 사랑> 주영훈<노을의 연가> 포지션<BLUE DAY> 박효신<메아리> 등의 가요와 <여우와 솜사탕> <장희빈> <히어로> <역전의 여왕> <태양을 삼켜라>등의 드라마 OST 350여곡 작사. 
현재 국민대콘서바토리와 서울문화예술대학, 한국 예술원, 서울종합예술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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