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에서 녹차를 야생으로 키우는 박영효선생은 녹차는 그 향이 짙고 그윽하다고 말했다.
[이뉴스투데이 울산취재본부 백승훈 기자] 지리산의 깊은 고요가 이슬처럼 내리는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의 산자락.  50대 중반임에도 젊고 왕성한 지혜가 흐르는 눈꼬리를 그대로 달려 지나가다  귀를 한 바퀴 돌아온 다음 완만하고 복스러운 코를 천천히 내려오다 만나는 듬직한 입이 있다. 

둥그스름한 턱에 다다르면 지리산의 고집스러운 정기가 부드러운 미소로 흐르는 이 사람을 만나게 된다. 두툼한 몸과 적당한 키가 차의 바다를 누비는데 조금도 불편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네 살에 불가에 입문해서 51년의 세월을 한 길만 걸어 온 자연인 운암 박영효 선생을 만났다.

Q. 새벽을 달려왔더니 이 곳의 잔잔한 아침이 상쾌한 미소로 마중 나오는군요. 카테킨 성분 탓인지 공기의 느낌이 사뭇 다른 것 같네요. 운암 선생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왔습니다.

A. 잘 오셨습니다. 쉬 오를 수 있는 거리가 아닐 텐데 먼 길 노고 많으셨습니다. 마땅히 대접해 드릴 게 없네요. 이 녹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Q. 감사합니다. 제가 이 녹차를 마시러 한 달음에 왔습니다. 선생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차를 만나게 되었나요?

A. 제가 동자승으로 있을 당시,  그 때는 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하루는 우리 반 어떤 아이가 기성회비를 잃어버렸다는 거예요. 아이들은 하나 둘 말없이 애꿎은 나를 쳐다보고 선생님 또한 무언으로 절에서 홀로 살아온 아이를 무작정 범인으로 몰아가는 터무니없는 상황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 날이 학교 수업의 마지막, 사회의 마지막이 되었던 거죠. 그래서 차가 자연스럽게 제 곁으로 오게 된 이유입니다.(미소)

Q. 첫 질문이 본의 아니게 불편을 드린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A. 괜찮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홀로 와서 혼자 가니까요. 삶이 혼자임을 깨닫는 것만도 몇 십 년은 걸린 것 같습니다.(웃음) 그건 그야말로 운명적인 인연이 아니었나 싶네요. 네 살 때, 본격적인 인생을 절에서 시작하게 되었던 것 말이죠.

Q. 그럼 학교 공부는 거기서 끝나셨나요?

A. 아니지요. 차와 살면서 독학으로 대입까지 치르고 승려들이 치르는 모든 시험도 통과하고 수 십 년을 이렇게 살아 왔네요.

Q. 그렇군요. 쉬운 과정이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스님 공부를 두 배는 하셨겠습니다. 차 재배가 어지간히 어렵지요?

A. 하하~ 늘 하는 일이고 생활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쉽지는 않지요.

Q. 짧지 않은 세월이었을 텐데 재배하는 차가 몇 가지되나요?

A. 주로 녹차와 같이 살지요. 군에서 조성한 큰 못의 연(연꽃:연잎차)도 저랑 친하게 지내고요, 고구마도 조금 재배하고 그 외에 배추를 꽤 심는데 그건 어렵고 힘든 어르신들이나 저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한 목적으로 재배하고 있어요, 나머지 쑥부쟁이 백초효소(깊은 산의 약재 백여 가지를 담아서 숙성해 내는 효소) 등 몇 가지 효소가 더 있는데 텃밭식으로 저도 먹고 지인들께도 나눠 드리는 정도지요.

Q. 후덕하십니다. 차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듣고 싶군요. 짐작으로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요?

A. 생각보다 시간도 많이 걸리고 정성은 말할 수 없지요. 여러 과정이 있답니다. 우선 4월 초순에 첫 물을 따는 '차잎 따기'가 있습니다. 이 과정부터가 예삿일이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딴 잎이 시들기 전에 250~300도의 고온에 신속히 덖어내는 '차잎 덖어내기'가 있습니다. 두 시간 정도가 걸리고요, 이 때 차잎이 타지 않게 해야 하므로 계속 덖어줘야 합니다. 이렇게 덖어 낸 차 잎을 열기가 식기 전에 비벼줘야 합니다. 이 과정을 '차잎 비비기'라 합니다. 이 작업을 아홉 번 반복한다 해서 <구증구포>라 하지요. 아홉 번 덖고 아홉 번 말리는 한약의 증포법을 차에 적용한 것이지요.

Q. 대단하네요! 엄청난 정성과 시간의 산물이군요. 그 다음은요?

A. 그런 후에 맛내기 작업을 합니다. 솥의 표면 온도를 140도 정도로 만들어서 3시간 정도를 해야 합니다. 이 때에는 솥에 꼼짝 않고 붙어 서서 세 시간을 쉼 없이 손으로 작업을 해야 하므로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지요. 덖어내기가 불과의 관계라면 맛내기는 인고의 시간이지요. 대략 다섯 시간의 여정이 이렇게 진행됩니다.

Q. 차를 만드는 과정이 마치 수행하는 느낌이네요. 보통 사람들은 흉내 내기도 쉽지 않겠네요. 그렇다면 차를 주로 만드는 시기가 있나요?

A. 첫 잎을 따는 4월 초순부터 꽉 찬 5월까지를 적기로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발효차라고 해서 6월에 만드는 차도 있는데 과정은 거의 비슷합니다.

Q. 보통 일이 아니겠군요. 그렇다면 덖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은데 꼭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A. 차잎 덖기는 차의 신선엽을 뜨거운 가마솥에 넣고 손으로 뒤집어 익히는 일인데 가마솥 덖음차 만드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공정입니다. 차잎에 있는 산화효소의 활성을 없애어 차 잎의 산화를 막아 녹차가 본연의 색상과 향미를 갖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고, 세포벽 등의 조직을 부드럽게 하고 폴리페놀 등의 성분을 잘 익혀서 잎이 잘 비벼지고 성분이 잘 녹아 나오게 하기 위함이 두 번째 이유이고요, 세 번째로 차잎에 있는 수분을 증발시켜 건조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차잎 덖기를 할 때는 차 잎의 양, 솥의 온도, 덖는 시간, 덖는 방식과 횟수 등의 여러 가지가 적절히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외에도 수많은 변수를 꼼꼼히 살펴야 하기에 풍부한 경험과 노력을 통하여 차잎 덖기의 진수를 터득해야 한답니다. 차잎 덖을 때에는 몸과 마음을 평화롭고 온전히 해야 좋은 차를 덖어낼 수 있지요.(웃음) 초의선사께서도 다신전 조다편에서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솥이 잘 달구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차 잎을 넣고 손을 재빨리 놀려 덖는다. 불을 늦추어서도 안 되고 잘 익혀야 한다... 중략... 다시 솥에 넣어 불을 조금씩 줄여 가면서 배건한다' 고 하셨지요.

▲ 차를 내리는 정성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진다.

Q. 엄숙한 수행 이상이겠군요. 잘 들었습니다. 수 십 년 차를 덖어 오시면서 일화도 많을 것 같은데요?

A.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차잎 따면서 부르는 여인들의 노래와 가끔씩 젊은이들이 성지 순례 개념으로 와서 머물며 젊음과 열정을 덜어 놓고 가는 정도이지요.

Q. 이 길로 들어 선 것을 후회하신 적도 있나요?

A. 후회까지는 아니어도 혈기 넘치는 시기에 명절을 지날 때 가끔 느꼈던 가족이나 핏줄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갈증 정도일 텐데 그것도 삶의 과정이려니 하고 엮어가고 있습니다.

Q. 절에 소속되어서 차를 만드시는 건가요?

A. 아닙니다. 5년 전에 환속을 했습니다. 지금은 좀 더 자유로이 차의 바다를 주유하며 살고 있습니다. 좀 더 깊이 있는 차를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고민도 좀 해보구요.

Q. 환속하신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으신지요?

A. 허허허~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습니까.

Q. 간단한 이치군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럼 운암 선생께서는 차잎을 언제까지 덖으실 계획이신가요?

A.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겠지요. 이것이 저의 천직이라 생각한 지 오래고 좀 더 풍미 깊은 차를 위해 여생을 함께 담아볼까 합니다.(너털웃음)
참, 그리고 내년 4월 초에 한 번 들러보세요. 차 만드는 모습을 그 때나 보여드릴 수 있겠네요.

Q. 긴 시간 내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시간을 만들어서라도 선생께서 덖어내는 차의 향취를 느끼러 기꺼이 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A. 대접이 소홀해서 송구하고 고맙습니다.

명절의 외로움이 서려있는 탓인지 손 흔들며 서있는 운암의 웃는 모습이 허허롭고 쓸쓸해 보였다. 차안에 향기롭게 덖어낸 녹차의 향이 동승한 듯 돌아오는 길이 은은하고 향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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