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해외 브랜드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발휘하며 소리없이 증가하고 있는 신진디자이너 브랜드. 국내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작은 쇼룸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대중화되기에는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예전에 비해 편집숍이 크게 늘면서 디자이너 브랜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됐지만 빠르게 출시되는 해외 SPA 브랜드 틈에서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다. 국내에서 국내 디자이너를 인정해주는 인식이 생긴다면 한국패션이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될 터. 획일적인 디자인에서 벗어나 신선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숨은 보석들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이선아 '아리(ALEE)' 디자이너

 

[이뉴스투데이 김은경 기자]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남은 원단이 쓰레기 취급 받는 게 싫어요"라고 말하는 이선아(29)에게 "설마 지금 우는거에요?"라고 장난스레 말했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감동했다고 해야 할까. 사소한 것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있게 생각하는 그녀는 내면이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쓰레기를 배출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지만 환경운동가는 아니며, 어릴 적부터 몸에 베어있는 습관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선아. 하지만 어느 누가 재단 가위가 지나간 남은 원단에 의미를 부여 할까.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그녀를 한남동 쇼룸에서 만났다.
 
 

Q: 쇼룸의 분위기가 흥미로운데. 
 
일반적인 쇼룸과는 다른 분위기일수도 있다. 이 곳은 내 브랜드의 옷을 걸어두는 역할 뿐 아니라, 전시 프로젝트가 열리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서는 '아리랑 자음 프로젝트'의 첫 번째 'ㄱ'을 통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쇼룸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문양은 조기석 작가의 작품이다. 
 
 
Q: 아리랑 프로젝트를 전개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브랜드를 론칭 하기 전부터 디자이너와 작가를 병행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다. 또 내 작품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작품과 작업 등을 소개해 줄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었다. 그래서 동대문 두타 두채존(신진디자이너샵)에 있을때 '~와 함께하다'는 뜻의 '랑'을 붙여 '아리와 함께'라는 의미의 회사 '아리랑'을 만들었다. 단순히 판매 목적이 아니라 고객들과 소통하고, 친구들과 생각을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이전 쇼룸이 '아리랑'이었다면, 현재 쇼룸은 '아리랑 프로젝트'로 명칭했는데 전시, 음악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주기적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이다.


▲ 한남동 쇼룸에 진열돼 있는 '아리' 의상

 
Q: 디자이너라는 꿈은 언제부터였나?
 

고등학교 때 건축을 하고 싶어서 이과를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미술을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해볼까? 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꾸게 됐다. 친언니도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했기 때문에 그 쪽으로 오픈이 돼 있었다. 미술을 한다면 당연히 패션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그 시점에 가브리엘 샤넬의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특별한 계기가 아닌 여러가지 사건이 모여서 패션디자이너가 됐다.

Q: 브랜드명 '아리(ALEE)'가 담고 있는 의미는?
 
내 이름 '이선아'(Lee Sun A)에서 선을 뺀 아리다. ALEE를 영어로 검색하면 '항해할 때 바람이 불어가는 쪽'이라는 뜻이고, 한글로 검색하면 '자리, 그 곳'이라는 뜻이다. 또 '아리지구'라는 곳이 있는데 티벳 쪽에 위치해 있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한다. 이 세 가지의 뜻이 모두 좋아서 '아리'라는 브랜드명을 사용하게 됐다.

 
Q: 디자인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그 가치가 더해지는 옷을 만들고 싶다. 나도 엄마의 옷을 입고 자랐던 것처럼 내 딸에게도 되물려 줄 수 있는 그런 가치있는 옷을 만들고 싶다. 빈티지를 좋아해서 그 감성이 디자인에도 조금씩 묻어나는데 빈티지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할머니, 엄마 세대를 지나 우리 세대로 왔다는 것이다. 내 옷도 세대를 거슬러 사랑 받았으면 좋겠다. 이러한 생각때문에 원단, 봉제, 패턴을 가장 신경쓰고 있다.

 

Q: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소비자가 부담스럽지 않은가?

솔직히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사람들의 반응보다 중요한건 내 만족이다. 사람들이 좋다고 해도 내가 만족스럽지 않으면 소용없다. 매출 또한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지만 매출이라는 숫자가 사람들의 반응과 직결된다고 해도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다.

Q: 창작물을 얻기 위해 평소 어떤 노력을 하는가?
 

예전에는 공부를 했다. 그 시즌의 주제가 정해지면 책도 읽고, 리서치도 하는 등 반년을 공부하는 데 쏟은 것 같다. 그런데 이번 S/S 시즌 콘셉트는 오로지 내 경험에서 나왔다. 쇼룸을 새롭게 오픈하면서 이사를 했는데 내가 정리정돈을 너무 못하는 것이다. 전에 있던 사무실은 20평이었지만 이 곳은 10평으로,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짊을 옮기려고 하니 너무 힘들었다. 추억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많았고, 사소한 것에도 가치를 두는 게 많아서 버리기 망설여졌다. 그래서 이번 시즌 콘셉트를 '정리정돈'으로 잡았다. 이런식으로 처해진 상황속에서 주제를 정할 수도 있고, 또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영감을 얻는 방법은 점차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다.

 

▲ 한남동 쇼룸에 진열돼 있는 '아리' 의상

 

Q: 이상봉 디자이너 팀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다. 
 
처음부터 좋아서 들어간 곳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옥 건축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적인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상봉 선생님이 궁금했다. 여러 회사에서 일을 했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회사 생활을 한다면 꼭 이상봉 선생님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Q: 2013 S/S 시즌을 보면 실루엣과 컬러가 매우 한국적이다. 이전 시즌과 느낌이 다르다.

2010 S/S 시즌부터 2011 A/W 시즌까지는 '혼돈 속에 질서' 즉 '카오스모스'[Chaosmos]가 콘셉트였다. 굳이 내가 콘셉트를 정하지 않아도 원단을 고르고, 색감을 고르고, 핏을 정하고, 패턴을 뜨면 무질서 속에서도 나 '아리'라는 감성의 질서가 보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작업실을 오픈하면서 내가 정리정돈을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의 감성과 지금까지 보여줬던 6개의 컬렉션을 한번 정리해보자라는 생각으로 '정리정돈'을 콘셉트로 정했다. 그래서 이번 S/S 시즌은 정리정돈이라는 단어의 느낌상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배제된 작품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나의 감성이 더 극대화됐다. 전체적인 디렉팅을 하고, 룩북을 보면서 '내 감성이 이렇구나'라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시즌이 재미있었던 게 나도 몰랐던 나를 알았다는 것이다. 내 작품에 유독 플라워 프린트가 많은데 나는 플라워라서 고른게 아니라 단순히 예뻐서 골랐다. 그런데 알고보니 내가 꽃집 딸이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작품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이다. '무의식'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됐다.
 

Q: 아리 공식 사이트에서 재미있는 글을 발견했다. 재단 가위가 지나가는 왼쪽과 오른쪽을 '탄생과 소멸'로 비유했던데.
 
내 옷이 쓰레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대량생산을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셔널 브랜드처럼은 아니다.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옷은 하기 싫다. 우리가 옷을 만들려면 패턴대로 원단을 자른다. 재단 가위가 지나가는 왼쪽은 쓸 수 있는 생명이 되고, 재단 가위를 자름과 동시에 나머지는 쓰레기가 된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쓰레기를 배출하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이런 생각을 확고히 했던 시점이 2008년도 졸업쇼를 준비하면서다. 당시 옷이랑 소통을 했을 정도로 열심히 했다. 쇼도 무사히 마쳤고, 결과물도 만족스러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작업실에 돌아와서 정리를 하는데 남은 원단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원단들은 내게 쓰레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옆에 있는 우레탄에 남은 원단을 넣어 쿠션을 만들었다. 쓰레기를 덜 배출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운동가는 아니다. 단지, 어릴적 습관이 몸에 베어있어서다.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이유도 다 버릴 수 없어서 그런 것 같다.
 

Q: 팔에 새긴 타투가 궁금하다.
 
'레드가 귀차는 낫썬 우체통'이라는 문장을 새겼다. 보통 우체통은 빨간색이다. 나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을 거부한다는 뜻에서 이 문장을 만들었다. 이 외에도 빨강의 보색인 녹색을 표현한 것으로, 녹색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Q: 패션 이 외의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가?
 
작업하고, 책 읽고, 미학 공부도 하고, 틈나면 인터넷으로 강의도 듣는다. 그렇다고 공부만 하는건 아니고 노는 것도 잘 한다. 놀 때는 질릴 때까지 놀고 지쳤다 싶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극단적인 예로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방학하고 일주일동안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영화만 봤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아서 강냉이로 때웠다. 그 생활이 지겨워지면 또 일주일동안 나가서 열심히 놀았다.
 

Q: 인생의 멘토가 있는가?

멘토는 딱히 없지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가브리엘 샤넬이다. 브랜드 샤넬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학창시절 그녀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패션'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학교다닐 때 리사이클(재활용) 브랜드에서 일을 했는데 헌옷으로 옷을 만들고, 가방을 만드는 브랜드였다.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내겐 값진 경험이었다.
 

▲ 인터뷰 중인 이선아 디자이너

 

Q: 패스트 패션에 열광하는 소비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감히 하지 말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솔직히 속상하다. 어짜피 영원히 지속될 것은 아니고 흐름이니까 막지도 못하고, 부정도 못하겠지만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쉽게 버려져서 쓸모 있는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상황이 안타깝다.

Q: 소비자들에게 '아리'가 어떻게 평가되길 바라는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디자이너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디자이너들이 열심히 하는구나', '저 디자이너는 옷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라는 생각을 갖고 관심있게 봐줬으면 좋겠다.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평가 받는 것도 좋아한다. 한번 더 찾아봐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우리 브랜드를 좋아해주면 더 좋고.

Q: 패션디자이너를 꿈꾸고 있는 패션학도들에게 한 마디.
 
쉽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많은 브랜드가 금방 생기고, 빠른 시간 안에 사라지는 것처럼 여기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애초에 쉬운 생각으로 옷을 만들고, 쉽게 그만두는 것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Q: 디자이너가 아닌 작가로서의 인생도 궁금하다.

'어떤 작업을 하는 작가에요'라고 단정지어서 말 할 수는 없다. 여러가지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창살 문양을 모티브로 아이패드 케이스와 아이폰 케이스를 만들어 전시 했고, 머리카락으로 족두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 외에 아트웍, 설치미술 등 내가 손을 대는 것들은 다양하다. 단지, 지금은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더 중점인지라 작가로서 여러가지를 시도하고 쌓은 다음에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이건 개인적인 바람인데 예전에 전시를 하러 다녔을 때, 대안공간루프에서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 곳은 신진작가들에게 대관료를 받지 않고 무료로 장소를 제공해주는 곳인데도 문턱이 좀 높았다. 그 때 '작가들이 전시할 공간이 참 마땅치 않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내가 공간을 갖고 있다면 원할 때 바로 공간을 꾸밀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제공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이 쇼룸은 부디 신진작가들에게 대안공간보다는 문턱이 낮은 곳이었으면 좋겠다.
 

 

■ 브랜드 특징

작가로서의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디자이너 '아리'는 작업을 통해 보여지는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성을 대중적이고 객관적인 디자인과 결합으로 특정한 트렌드나 테마에 휘둘리지 않고, 참신함과 동시에 차분한 익숙함을 지향한다.

▲ 아리 2013 S/S 룩북
 

■ 올 여름 이선아 디자이너 추천의상

오가닉 느낌의 소재로 나긋하고 은은한 플라워 프린트가 환상적인 뉘앙스를 연출한다. 소프트한 파스텔 톤과 애시드한(형광색) 오렌지 컬러의 안감이 믹스돼 몽환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또 누구에게나 어울리는 핏을 가지고 있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것이 특징. 벨트나 레인부츠와 코디하면 올 여름을 스타일리쉬하게 보낼 수 있다.

 

■ 이선아 디자이너 프로필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이선아는 2008년 이상봉 메인팀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두타 벤처 디자이너 컨퍼런스에서 동상을 수상했으며, 2010년 브랜드 '아리(ALEE)'를 론칭했다. 이후 신진디자이너 등용문인 '동대문 패션창작스튜디오'에서 가능성을 인정 받고 입주해 자신의 창작활동을 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는 내공을 쌓았다. 또 경복궁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고, 공예 트렌드 페어에 참가, 한남동에 위치해 있는 자신의 쇼룸을 전시 공간으로 바꿔 전시회를 여는 등 패션과 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 여러분의 제보가 뉴스가 됩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소비자 고발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이메일 : webmaster@enewstoday.co.kr

카카오톡 : @이뉴스투데이

저작권자 © 이뉴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