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스포티지 [사진=기아자동차]
2021 스포티지 [사진=기아자동차]

[이뉴스투데이 조채원 기자] “마지막에 웃는 자가 승리자”라는 말은 기아와 현대자동차를 두고 하는 말이다. 출발 당시 기아는 현대차와 대우자동차, 지금의 한국GM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기업이었으나 외환위기로 현대그룹에 인수된다. 합병 이후에도 독자 기업을 유지하고 재기에 성공했지만, 인수 이전의 영화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일어나는 아시아, 기아(起亞)

기아자동차의 창립자는 고 김철호 회장이다. 경북 칠곡에서 태어난 김 회장은 일제강점기이던 1922년 17세의 나이로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삼화제작소 종업원으로 일하다 1930년 성실함을 인정 받아 삼화제작소 사장이 된다. 삼화제작소에서 김 회장은 자동차와 자전거 부품을 생산했다. 해방 무렵 김 회장은 귀국해 1944년 기아자동차의 모태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김철호 기아자동차 창업자. [사진=위키백과]
김철호 기아자동차 창업자. [사진=위키백과]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던 경성정공은 1950년에 있었던 6·25 한국전쟁으로 생산설비와 함께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라 부산 공장을 세운다. 1952년 3월 국내 최초의 자전거 ‘삼천리호’를 출시했다. 삼천리호는 오늘날의 삼천리자전거의 기원이 된 모델이다. 같은 해 김 회장은 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했다.

‘기아’는 한자로 일어날 기(起)에 버금 아(亞)를 쓰는데 ‘일어나는 아시아’라는 의미가 있다. 이외에도 영어 Gear를 일본식 발음과 병기로 기아가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기아산업 K-360. [사진=기아]
K-360. [사진=기아]

1957년 시흥 공장이 설립되고 1961년 일본 혼다와 합작해 2륜 오토바이를 처음 생산했으며, 1962년 도요공업의 356cc 3륜 화물차 K-360을 생산해 3륜차 시대를 연다. 이후 기아산업은 본격적으로 자동차 산업을 시작, 1970년 4륜 화물차 복서와 타이탄을 출시, 연전연승한다. 이를 기반으로 기아산업은 3년 뒤 우리나라 최초로 일관공정 시스템을 갖춘 경기도 광명시 소하리 자동차 공장을 설립한다.

1973년 6월 완공된 소하리 공장은 1만6000평 규모로 현대자동차의 정주영도 와서 배울 정도로 현대식 공장이었다. 소하리 공장 설립과 함께 엔진 개발에 매진해 국내 최초로 2000cc 4기통 VA 가솔린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해외시장 첫 출시되는 브리사(1978). [사진=기아]
해외시장 첫 출시되는 브리사(1978). [사진=기아]

1970년대 초반 당시 국내 자동차업계의 최대 과제는 국산화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1974년 60%, 1975년 75%, 1976년에는 90% 이상 자동차 국산화를 이룬다는 목표를 천명하고 기아와 현대, GMK 3개사를 육성한다. 이로 인해 탄생한 모델이 기아의 브리사와 현대 포니, GMK 제미니였다.

브리사(S-100)는 1983년까지 총 3만1017대가 생산된 인기모델이었다. 0.5t 브리사 픽업 B-1000과 2,5t 디젤 타이탄 E-2700, 4.5t E-4100 트럭은 최초로 해외에 수출된 산업 역군이었다.

◇아시아자동차 인수와 승용차 생산 금지령

1976년 기아산업은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아시아자동차공업사를 인수한다.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아시아자동차공업은 기아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업이었으나, 무리한 사세 확장으로 인해 부도가 나 기아산업에 인수돼 군수차량을 생산하는 전문업체로 성장했다.

1981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산업합리화)로 인해 정부로부터 '중소형화물차 및 버스 전문생산업체'로 지정받아 승용차 생산이 금지되면서 경영 위기를 맞았다. 기아는 자본과 경영을 분리해 전문경영인 체제로 개편하고, 1980년 9월 봉고(Bongo) 1t 트럭을 생산·판매했다.

기아 봉고 9인승. [사진=기아]
기아 봉고 9인승. [사진=기아]

봉고는 기아와 기술제휴 관계에 있었던 일본의 마쓰다가 제작했던 동명의 상용차, 마쓰다 봉고를 제휴 생산한 차량이다. 다음 해인 1981년 8월 이를 기본으로 한 12인승 밴 봉고 코치를 출시했습니다. 봉고 코치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이에 이어 6인승 봉고 밴, 9인승 봉고 나인으로 라인업을 넓혀 나갔다. 이후 봉고는 모든 승합차의 대명사가 됐다.

1982년부터 원가절감운동 'RCD-22' 작전을 밀어붙여 경영을 정상화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위기를 넘겼을 뿐이지 자동차공업 통합조치의 여파를 모두 털어버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87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가 풀리고 프라이드, 콩코드로 다시 승용차 시장에 진출했다. 1989년 필리핀 정부로부터 처음으로 국민차개발 참여업체로 지정받은 뒤 1992년 일본에 첫 현지법인을 세웠으며, 최초의 독자 모델 세피아를 출시했다.

1t 봉고트럭 생산 기념식(1980). [사진=기아]
1t 봉고트럭 생산 기념식(1980). [사진=기아]

1994년 로고를 변경하고 기아는 세피아와 스포티지를 처음 독자적으로 수출했다.

1997년 7월 경영악화로 부도를 맞은 뒤 1998년 4월 법정관리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같은 해 6월 국제 공개 경쟁입찰로 처리방침이 확정됨에 따라 1998년 10월 현대자동차에 낙찰된다.

1999년 6월 기아판매, 아시아자동차, 기아대전판매, 아시아자동차판매 4개사를 통합한 뒤 2000년 2월 현대그룹에 편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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