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마 사이언스] 인간 존엄성 파괴하는 SNS와 인스턴트식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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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마 사이언스] 인간 존엄성 파괴하는 SNS와 인스턴트식 인간관계
‘소셜포비아’, ‘너브’, ‘네온 데몬’, ‘아이, 토냐’…미디어와 대중의 시선은 어떻게 개인을 파괴하는가
  • 여용준 기자
  • 승인 2019.10.19 0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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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SNS의 시대상을 반영한 영화 '소셜포비아'. 지금은 더 현실같아졌다. [사진=CGV아트하우스]

[이뉴스투데이 여용준 기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온라인상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로, 쉽게 말해 인터넷상에서 인간관계를 원활히 해주는 플랫폼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맺기 어려운 인간관계를 온라인을 통해 맺도록 도와주고 평소 하지 못한 말들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SNS의 발달은 여러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했다. 통신 속도가 빨라지면서 글자뿐 아니라 사진과 동영상, 이모티콘 등을 전송할 수 있게 됐고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면서 놀이가 가능한 여러 기능이 추가됐다. 그리고 디바이스의 발달로 다양한 플랫폼에서 고도화된 SNS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 

때문에 SNS는 IT과학의 집대성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와 동시에 현대 문명사회에서 소외된 인간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영화는 늘 이에 대해 경고했다. 2014년 개봉한 한국영화 ‘소셜포비아’는 SNS상에서 일어나는 사이버불링(온라인상 집단 따돌림)의 사회적 문제를 제기했고 미국영화 ‘너브’는 실시간 방송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밖에 SNS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SNS의 문제점을 다른 형태로 보여주는 영화들도 있다. 니콜라스 윈딩 레픈의 ‘네온 데몬’의 경우 대중적 아름다움을 쫓는 행위의 공허함과 주변 시선의 공포를 화려한 이미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실제 피겨스케이팅 선수 토냐 하딩의 이야기를 다룬 ‘아이, 토냐’는 미디어에 의해 덧씌워진 한 인간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다. 

미디어가 덧씌운 개인의 실체를 파헤치는 영화 '아이, 토냐'. [사진=영화사 진진]

미디어는 한 개인의 이미지를 마음대로 덧칠한다. 과거에는 정치인이나 연예인 등 유명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현재에는 SNS의 발달로 모든 사람들이 ‘미디어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한국영화 ‘소셜포비아’는 이런 시대의 미디어를 보여주고 있다. 

때문에 SNS의 윤리를 묻는 것은 과학의 윤리를 묻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어떤 과학기술은 그 자체로 아무 죄가 없이 사용자의 도덕의식에 의해 무기로 사용됐다. 반면 어떤 과학기술은 무기를 위해 개발됐다. 본 코너에서는 영화 ‘엑시트’와 독가스를 다루면서 이같은 사례를 언급했다. 

이는 최근 개봉한 영화 ‘제미니맨’에서도 보여준다. 최고의 킬러 헨리(윌 스미스)의 유전자를 통해 복제인간을 만들고 이들에게서 공감능력을 제거하고 신체능력을 살인무기화 하는 것이다. 언젠가 사람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 기술이 사람을 죽이는데 쓰인 사례다. 

SNS는 어떨까. 이것은 인간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 개발된 도구일까, 아니면 시민 각자가 주체적으로 의견을 내고 소통하기 위해 개발된 도구일까. 

앞서 언급한 SNS의 정의를 다시 상기시켜보자. ‘온라인상에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 그 얘기는 오프라인에서 인적 네트워크 형성이 어렵다는 의미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일은 당연히 어렵다. 업무가 고도화되고 사람 간에 계산할 것이 많다면 상대방과 단순하게 인연을 맺는데 어려움이 생긴다. 특히 상대방에 대한 의심과 계산이 늘어날수록 사람을 사귀는 일은 더 어렵다. 

SNS의 본래 목적은 이를 쉽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발명은 사람들이 어렵고 불편하게 느끼는 것을 쉽게 만드는데서 비롯된다. TV 앞에 가서 다이얼식 채널 돌리는게 귀찮아서 리모콘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대한 CD플레이어가 불편해서 MP3를 만들었고 이것 역시 스마트폰과 결합시켜버렸다. 

인간이 SNS를 발명한 것은 사람 사귀는 일의 불편함을 쉽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정녕 우리를 편리하게 만들었을까. 

SNS는 인간관계를 인스턴트화 시켰다(위 사진은 본문과 무관한 자료사진입니다). [사진=트위터 캡쳐]

음악을 LP로 듣던 시절에는 음악이 참 귀했다. 그 큰 LP판을 휴대하면서 들고 다닐 수도 없었고 조금만 관리를 잘못해 흠집이라도 나면 제대로 된 음악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전축에서 한 번 음악을 듣고 나면 마른 수건으로 LP판을 잘 닦아서 보관하곤 했다. LP판을 귀하게 여기던 시절에는 음악을 듣는 일 자체도 귀했다. 

그러다 CD와 MP3를 거쳐오면서 음악을 듣는 일은 편리해졌다. 언제 어디서건 음악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일 자체의 소중함은 어느새 잊어버렸다. 

사람을 사귀는 일도 마찬가지다. 얼굴 마주보고 감정을 주고받으며 만난 사람은 ‘팔로우’ 버튼 하나로 사귄 사람보다 귀하다. 당연히 ‘팔로우’ 버튼으로 사귄 사람은 그 실체를 모르는데다 쉽게 사귀었기 때문에 귀한 줄 모른다. 

그래서 SNS 상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험한 말도 쉽게 할 수 있고 욕설과 비난, 성희롱도 마구 하게 된다. 온라인으로 알게 돼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신체와 언어, 행동을 가진 유기체로써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온라인상에 존재하는 데이터 하나에 불과하다. 

악플러들을 고소한 연예인들은 그 후기에 대해 “실제로 고소하고 만나봤더니 선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한다. 맹자의 ‘성선설’에 대해 온전히 믿지는 않는다. 날 때부터 악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얼굴을 마주보고 악해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SNS는 인간 내면의 악함을 끄집어 낸 도구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인스턴트식 인간관계’를 통해 인간 존엄성에 둔감해지도록 하는 SNS 고유의 특성도 있다. 

최근 한 출연연에서는 4D와 SNS를 결합한 플랫폼을 내놨다. VR을 통해 사람들이 만나고 촉각 디바이스를 통해 물건을 만지고 인터랙션을 할 수 있는 SNS 플랫폼이다. 

5G 상용화 이후 SNS의 고도화는 당연한, 혹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다. 그 출연연이 SNS 플랫폼을 공개한 그날은 한 어린 연예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다음날이었다. 구체적인 유서가 공개되지 않아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사람이 ‘악플’ 때문에 목숨을 끊었을 것이라는 건 공공연한 결론이다. 

SNS와 인터넷으로 사람이 죽은 날 새로운 SNS 플랫폼을 접한 일은 꽤 무서웠다. 현재까지 이뤄진 과학의 발전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인간의 존엄성을 해쳤다. 산업문명의 발달은 인간을 도구화했고 부품으로 만들었다. 이는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전한 경고이며 최근까지도 ‘조커’와 ‘매트릭스’ 등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그런 산업화의 시대를 넘어 정보화,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이르면 앞으로 인간은 얼마나 더 하찮은 존재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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