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잘 모른다. 가뭇한 기억이지만 진보진영의 토론회에서 한차례 마주했을 뿐이다. 간혹 방송에서 날 선 시각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그를 호기심으로 바라본 정도였다. 당연지사 그의 언행은 내게 데면데면했다. 그런 그가 작금의 조국 사태에 대해 ‘윤리적으로 패닉 상태’라고 고백했다. 조국 사태는 공정성과 정의의 문제이지 결코 이념이나 진영으로 나뉘어 벌일 논쟁 문제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조국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진보’와 ‘보수’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거두어들였지만 진보 정당의 탈당계를 내기도 했다. 그의 태도는 신선했고 말은 살가웠다.

작금의 사태에 대해 진영 간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굳이 이 글에서 평하고 싶지는 않다. 입장이 바뀐 상태에서 그토록 비난하던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반복하는 무례함은 양 진영 간 별반 차이 없다. 한국 사회의 이러한 현상은 공포스럽다. 공적 책임의 자리엔 자기방어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응당 내재돼야 할 도덕성은 이제 대중에 대한 뻔뻔함으로 전용된다. 한쪽에서는 검찰개혁을 추진할 사람이니 항간에 유행하는 ‘묻고 더블로 가자’는 말로 애써 타이른다. 그러나 타인의 작은 허물에는 분노하면서 자신의 모난 비리에는 한없이 관대한 진보진영의 불공정함에 숨이 턱 막힌다. 그러나 어디 진보진영뿐이랴. 이젠 보수야당의 누구도 도마 위에 오른다. 난형난제다.

국민이 동의하는 검찰개혁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주체는 국회가 돼야 한다. 한 개인의 개인기로 완수할 과제가 아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묻는다. 왜 그이여야만 하는가? 이 근원적이고 보편적 질문에 그 누구도 답을 못한다. 윤리적 기준은 혼재되고 정의가 불편해진 혼돈의 상황이 이러함에도 침묵의 카르텔은 현재진행형이다. 진중권의 일갈은 그래서 반듯하다. 그가 겪고 있을 진영 내 모진 비판도 우려스럽다. 그러나 항간의 그는 의연하다. 소신에 대한 내공이 느껴진다. 이럴 때 진보의 가치는 우월하다.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진영논리로 해석하고 대응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는 불온한 시대를 우린 살고 있다. 배타적이며 획일적인 것들이 주장이 아닌 당위가 되고 명분이 되는 서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성적 객관화의 부재로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버겁고 고단해진다. 내 편의 비리는 무조건 옹호하고, 문제를 제기한 상대를 적대시하며 비난하는 적반하장의 현실에서, 당사자의 잘못은 스멀스멀 해진다. 진영논리를 대중 속에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는 부조화되며 오류는 당연시된다. 선악을 흐리게 하는 이념 과잉과 승자독식의 정치지형 속에서 가짜 안보와 입 진보는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세력이 된다.

조국 사태에 대한 과도한 이분법적 진영논리로 실체적 정의에 대한 담론이 끼어들 여지는 협소하다. ‘밀폐된 광장’에는 양 진영 간의 주장이 난무하다. 인색하지만 서초동과 광화문 광장의 집회가 대의제를 보완하는 직접 민주주의라고 에둘러 평하고 싶지는 않다. 합리적 이성보다 편향적 당파성에 매몰된 정치에 대한 관심이라면, 직접 민주주의라고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대의제를 파괴하거나 발전시켜서 더 많은 목소리를 담으라는 것이다. 지지 세력의 결집이 아니지 않은가. 

조국 사태에 대한 획일적 진영논리는 대중의 정치적 반감과 무관심을 잉태한다. 일상이 돼버린 진영 간 다툼에 문제의 본질은 이미 유실돼 버렸다. 이쯤 되면 답답해지는 건 국민이다. 정치에 대한 혐오는 커져만 간다. 그 틈을 노려 진실의 문은 닫힌다.

우리가 진중권처럼 진영의 논리만을 획일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상황의 합리성에 주목할 때 다양성의 사회는 다가온다. 그 사회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공동의 관점과 일반적 가치를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으로 간주했던 것들은 전체주의였다. 그리고 유토피아에 대한 허상의 그늘에 주목했다. 열린사회는 흙 수저가 계급이 아닌 사회이다. 소수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깨어있는 다수에 의해 자생적 질서를 구축하는 사회이다. 어른들의 방기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청년고용 절벽의 시대에 조국 사태가 있다. 불법이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 들여 백 번 양보해도 논문저자 등재와 인턴기회의 비대칭은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보수가 아닌 병든 보수와 공동체적 좌파(左派)가 아닌 개인주의적 자파(自派)를 제어하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닫힌사회이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진영 안의 카르텔은 합리적인가? 기득권의 두터운 웃옷을 두르고서 자식을 배려하는 이들이 어찌 흙 수저 청년들의 다가오는 혹한의 겨울을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공동체는 멀고 가족은 가깝다. 스스로 신념에 찬 리버테리언도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한없이 파시스트가 된다. 거대담론의 진영 간 논리는 으리으리해졌지만, 표독스러운 야만으로 흘러넘친다. 오늘 우리는 그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확성기 든 가짜 보수와 입 진보의 고성방가는 오늘도 계속된다. 국민들이여 귀를 닫으시라.
허나 진중권 양심의 소리에는 귀 기울이시라.

前 노사정위원회 위원
前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現 극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現 이뉴스투데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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