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여용준 기자] 과거 대학입학을 준비하던 시절(혹은 그 이전부터) 어른들에게 자주 듣던 말은 “인문계는 굶어죽는다”는 것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께서도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문대학으로 진학했다. 반항심이나 지향하는 바가 있어서 간 건 아니었다. 그냥 그게 재밌었고 그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후 지역 일간지에서 기자를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다가선 줄 알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과학을 담당하는 기자가 됐다. 이 일을 하게 됐을 때 나는 내가 잘하는 일과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징징대기에는 이미 꽤 어른이 돼있었다. 사람이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다는 것은 경험을 통해 충분히 체득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열망은 잠시 마음 깊이 담아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여름철 아스팔트 도로 위의 아지랑이처럼 스멀스멀 올라온다. 

과학 분야를 출입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다 못해 잠꼬대를 할 정도로 자주 들은 말이 ‘4차 산업혁명’이다. 마치 군기 잡힌 일병의 ‘복무신조’처럼 건드리면 튀어나올 정도로 자주 들은 말이다. 시대는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고 세계는 더 좁아졌다. 거세지는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결국 일은 사람이 하기 때문에 우리의 인프라는 ‘사람’이다.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정부가 마련한 일자리는 제조업과 소프트웨어가 중심이 돼있다. 나는 “정부가 인문학을 배척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내가 과학 분야 출입기자라서 그런 오해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국가가 인문학을 배척한다는 것을 애써 외면했다. 

그러나 최근 한 보도자료를 받고 나는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올 9월 KAIST와 고려대, 성균관대가 인공지능(AI) 대학원을 개설한다는 내용이었다. 각 학교들은 특성에 맞게 커리큘럼과 교수진을 마련했고 학생들을 모집한다. 

그 가운데 성균관대의 교육 계획에는 “이공계 이외의 다른 분야 전공자들에게도 입학의 문을 넓혀 인문·사회학 계열에도 AI 연구를 이식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있다. 

이 대목을 읽고 나는 좌절했다. 인문학을 배우고 글을 쓰고 싶어 인문대학으로 진학한 학생들도 결국 코딩을 배우고 AI 연구에 뛰어들어야 하는가 싶었다. 

최근 대학들이 받는 비판 중에서는 “대학이 지식을 쌓는 곳인가, 아니면 취업학원인가”라는 것이었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일념이 강해지면서 교육의 모든 화두는 ‘먹고 사는 일’에 집중됐다. 

나는 대학시절의 나와 마찬가지로 글 쓰고 사유하고 싶어서 인문대에 진학한 학생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국민들 중 누군가는 문학을 해야 하고 철학과 역사를 연구해야 한다. 나는 그들 역시 잘 먹고 잘 살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2011년 영화 시나리오 작가였던 故 최고은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경찰은 최씨가 갑상성기능항진증과 췌장염을 앓다가 수일째 굶은 상태에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 숨졌다고 전했다. 

과학 담당 기자가 이런 걱정을 하는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부와 기업의 지원 속에 풍요롭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ICT·전자업계, 그리고 과학계를 바라보면 어딘가에서 배고픔 속에 글을 쓰거나 원치 않는 코딩을 배우고 있을 무명의 인문학도들이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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