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세상을 살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든 암은 참으로 불편한 손님이었다. 가뜩이나 비좁은 일상을 비집고 들어선 모진 병은 그 행간도 불온하지만 존재를 아득한 암전에 가둬놓는다. 3년 전 내 경우가 그러했다. 아프기 전과 후의 삶의 풍경은 마치 긴 터널, 안과 밖의 명암 차이만큼 갈라져 있었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존재에 대한 온전한 성찰의 시간을 허락해 주는 게 통증이라 썼지만 큰 병 앞에서 그런 내공을 보이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누구나 가늠하기 힘들었던 죽음이란 것이 간결해진 병마의 무게로 다가서면 일상은 무겁고 서늘해진다. 착한 암이라 달래고 보듬으며 쾌차한 지금, 다시 그 불편했던 손님은 35년 더불어 살아온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도 찾아들었다. 기척도 없이.

생계를 위해 살다 보면 제 한 몸 간수하는 것조차 지난한 문제임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부지불식간에 찾아온 병마와 의연하게 대비한 채 맞서는 일은 여간해서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일상적 건강수칙을 지켜내는 일이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인생이라는 주변의 조언들도 귀에 딱지처럼 달라붙은 도덕경 같았다. 통증은 일상의 자유를 구속하는 우환으로 들이닥친다는 것을 모진 경험으로 체득한 이후에야 건강의 가치를 온전하게 받아들였다. 친구도 그러했다. 한 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의 우매하고 처연한 일이었다.

속절없이 찾아온 병마로 인해 희망 없는 날에도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삶의 채색은 중단된다. 친구는 의사로서 자긍심이 넘쳐 나던 존재였다. 부유하진 않아도 삶은 연착륙해가고 있었으며 안락한 노후를, 혹은 근사한 미래를 늘 내게 꿈꿨다. 그런데 암이라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쳤다. 조짐은 진작부터 보였다. 사실은 예고된 방문이었던 것이다. 세 달여 전부터 마른 기침을 연신 내뱉었으며 얼굴의 혈색도 예전 같지 않았다. 직업으로서 타인의 몸을 돌보았지만 정작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 오십 고개를 훌쩍 넘어가면서도 푸른 나이라 우겨가며 믿고 산 일상이었다.

친구의 오만을 질책하듯 큰 병원에 가보라는 동네의원의 진단에 대학병원을 동행하는 길은 암울했고 멀기만 했다. 그러나 절망보다 낙관이 우세했다. 일시적 이성의 중단이려니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이 나이에 그리 큰 병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격다짐이 있었다.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그 어떤 위로도 그의 슬픔의 수렁을 메울 수 없었다. 햇볕이 없는 먹구름 아래에서 암이라는 젖은 옷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나의 일상도 허허로운 잿빛 하늘 아래 멈춰 섰다.

건조하게 박힌 폐암이라는 조직 검사 결과지에는 덧없는 인생의 무게도 스며들었다. 입원 날짜를 정하고 병원을 나서며 눈물을 머금는 그를 보며 봄날의 기운조차 애절했다. 불쑥 찾아든 불편한 암은 그렇게 일상을 잘금잘금 삼켜갔다. 가슴을 울린 슬픔의 공명을 그 앞에서 감히 드러내기도 쉽지 않을 처연함과 함께.

암 선고라는 폭풍이 휩쓸고 간 뒤 이에 대처하는 자세는 참으로 지난하고 황망했다. 무엇을 해야 될지 어떻게 번잡한 일상을 정리해낼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절망을 부르짖는 저편에선 희망을 노래하기도 한다. 비가 오지 않는 땅은 사막이 되기 쉽다. 근거에 기초한 사실적 판단보다는 밑도 끝도 없는 희망에 의지한다. 하지만 이내 폭우를 견딜 우산을 찾기조차 버거워진다. 게다가 가족의 절망이라는 우레도 내리친다. 나도 그러했고 친구도 예외 없었다. 평온한 생에서 언제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1)를 상기해야 되는 이유이다.

타인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일만큼 우리 인간에게 어려운 일은 없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될 일이다. 공감은 관계의 근간이기 때문이다. 통증 앞에 감당 못할 무기력으로 홀로 나약해지는 인간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병이 들면 일상에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또 스스로를 존중하는 자존감도 쇠약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운신에 제약까지 느끼면, 아픈 이의 존재는 더욱 작아진다. 타인의 고통에 우리가 더 귀를 열고 가슴을 열고 미덥게 마주해야 될 이유가 그것이다. 어쩌겠는가. 붙잡은 손에 체온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누구나 삶의 시작은 ‘헤어짐’에서 비롯된다. 삶은 끝없는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러나 언젠가 이별하게 될 친구이지만 온전한 채비가 필요하다. 이 찬란한 봄을 이듬해에도 같이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시나브로 찾아온 불편한 손님에게 전투적인 ‘투병(鬪病)’보다 사람의 향기인 ‘친병(親病)’으로 환대하자고 했다. 그리하겠다는 굳은 약속도 했다.

언약은 강물처럼 흐리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난다. 봄꽃처럼 눈부실 친구의 건투를 빈다.

■용어설명
메멘토 모리(Memento mori)(1) :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 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를 뜻하는 라틴어 낱말

前 노사정위원회 위원
前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現 극동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現 이뉴스투데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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