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함도. 1940년대 수많은 조선인들이 강제 징용 당한 곳이다. 섬의 모양이 일본 해상군함 ‘도사’를 닮아 ‘군함도’라 불린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태화관 터와 탑골공원 모습.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이 모여 3.1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곳이다. 만해 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민족대표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다. 현재 태화관 터에 ‘삼일독립선언유적지’ 비석만 남아있다. 탑골공원에서는 정재용이 독립선언서을 낭독하고 시위대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아우내 장터 모습. 1919년 4월 1일, 서울에서 3월 5일 남대문 독립만세운동을 참여한 이화학당 여학생 유관순 열사를 포함해 3000여명 군중이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뒤 시위 행진을 했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신한촌. 새로운 한인촌이라는 뜻을 가진 신한촌은 블라디보스토크 외곽 산기슭에 있던 한인 집성촌이 북쪽으로 강제 이주돼 새로 터를 잡은 곳이다. 독립운동가 최채형, 이상설 등이 참여한 권업회, 한민학교 등 민족단체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1920년 4월 일본군에 의해 잔인한 학살이 있던 슬픈 역사도 있으며 1999년 8월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신한촌 기념비’가 설립됐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서대문형무소. 1908년 문을 연후 조국 독립을 위해 항거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옥고를 치렀던 곳이다.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 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등이 남아 있다. 1992년 8월 15일, 광복 47주년을 맞이해 서대문 독립공원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러시아 사할린 코르사코프 항구. 사할린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대부분 일제 말기에 징용노동자로 강제 연행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당시 약 4만3000명의 한인이 사할린에 거주하고 있었다. 강제징용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에는 합동추모비가, 8.15 해방 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귀국선을 기다렸던 코르사코프 항구에는 망향탑이 세워져 있다.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 측의 일방적인 국적 박탈 조치로 귀환하지 못했고 러시아도 송환을 외면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94년 한일 정부가 뒤늦게 사할린 동포 시범 송환에 합의해 약 4300명만 한국으로 돌아왔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뤼순형무소. 1902년 건축돼 일본이 뤼순을 점령한 후 1907년 확장했다. 이곳은 1909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독립운동가 안중근과 역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신채호가 순국한 곳으로 독립 운동가의 숭고한 희생과 고결한 뜻이 머문 장소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독립기념관. 1987년 국민 모금운동으로 건립된 독립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와 발전사 자료를 모아 보존, 관리, 전시하고 있다. 3.1운동 당시의 감동과 선조들의 열망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이뉴스투데이 여용준 기자]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이 깃든 만세 운동 유적지 등을 촬영한 위성영상 8점을 27일 공개했다.

이번 영상은 다목적실용위성 3호, 3A호가 촬영한 것으로 3A호는 세계적 수준의 고해상도(0.55m) 광학영상을 촬영할 수 있다.

※ 여러분의 제보가 뉴스가 됩니다. 각종 비리와 부당대우, 사건사고와 미담, 소비자 고발 등 모든 얘깃거리를 알려주세요

이메일 : webmaster@enewstoday.co.kr

카카오톡 : @이뉴스투데이

저작권자 © 이뉴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