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에 고향에서 만난 친구는 분기탱천했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며 대척점에 서있는 정당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날이 서있었다. 비판의 대상이 된 논거들은 가늠하긴 어렵지만 보편적 상식선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듯했다. 그러나 뭐라 반론을 제시하기엔 명절이 주는 너그러움에 반하는 터라 경청을 감내해야 했다. 오랜만의 술자리는 불편했고 당혹스러웠다. 그의 비판의 기저에 사실 확인은 요원했고 왜 그 정당을 비난하는지 논리는 부실했으며 허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친구가 태어나고 거주하는 지역이, 지지하는 정당이 주류를 이루기에 맹목적으로 그들의 진영에 속해있는 이로서의 선택이리라 여겨질 뿐이었다. 오래 보아 온 친구이기에 그의 일상적 보수 성향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의 정치적 선택이 때론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어디 나의 경험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진영논리로 해석하고 대응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를 살며 곤혹스러워하는 이들은 지천이다.

진영논리의 사전적 의미는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 옳고, 다른 조직의 이념은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는 논리’를 말한다. 배타적이며 획일적이다. 늘 대척점에 서있으며 사회에도 해롭다. 이성적 객관화가 전제되기 어렵기 때문에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힘들어진다. 내 편의 비리는 무조건 옹호하고, 문제를 제기한 상대를 적대시하며 비난하는 적반하장의 현실에서, 당사자의 잘못은 온데간데없어지니 말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자성어를 흉내 낸 ‘내로남불’이라는 신생 정치용어를 사회에 확산시켰다.

이 경우 진영논리를 대중 속에 합리화하기 위해 논리는 부조화되며 오류는 당연시된다. 진영에 속해 있지 않은 제3자가 진영에 속한 사람에 비해 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건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객관적 의견은 대접받지 못한다. 진영의 소속감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상식을 벗어난 무리한 요구나 주장의 근저에는 진영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특정 진영에 몸담으면 쉽게 빠져나오거나 진영논리에 반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할 수 없다. 대부분 자발적이지만 진영으로부터 받을지도 모르는 비난이 두려워서 정치사상의 결이 다름에도 스스로를 진영 안에 결박하는 경우를 흔히 보아왔다. 이른바 침묵의 카르텔이다.

진영논리는 견제와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순기능이 있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민사회에서 가능한 일이다. 자기정화와 분별력을 잃은 진영논리가 왜곡되면 경쟁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며, 급기야는 나라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끈다. 거친 표현이지만 합리적 이성보다 편향적 당파성에 매몰된 정치에 대한 관심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선악을 흐리게 하는 이념 과잉과 승자독식 대선의 정치지형 속에서 정치 자영업자들이 활약할 정치와 선거 토양은 비옥하다.

우린 이미 정치 자영업자들이 만든 댓글 게이트로 현직 도지사가 법정구속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온 나라가 두 갈래의 의견으로 갈린 채 혼란스럽다. 권력투쟁이 당연시되는 정치 현실에서 진영 대립 현상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공존과 공유의 여지가 없는 권력투쟁은 사회적 해악이다. 하나의 기준을 절대가치로 강요하는 것은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철 지난 5공 시절을 그리워하는 이들을 간혹 목도한다. 그들의 논리는 한결같다. 그 시절 나라가 소란스럽지 않았다는 이유이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본디 시끄러운 것이다. 민주 사회는 구성원 모두가 주체가 되어 이견을 평화적으로 포용하면서 공존하는 원리다. 다양한 견해와 이해관계가 상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다양성을 포용하는 능력이 클수록 발전된 시민사회로 나아간다. 너무 바른생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깨어있는 사회를 염원한다면 응당 가야 될 길이다.

과도한 이분법적 진영논리는 포털 뉴스의 댓글에서도 치열하다. 진영 싸움을 넘어서는 새로운 공론장 마련은 난망하다. 이렇게 되면 사회 동력은 소모된다. 공론을 통한 변혁의 가능성과 시민사회 성숙의 여지는 협소해진다. 이미 한국 사회는 밀봉된 비닐 팩처럼 공론의 공기는 막혀 가고 있다. 나는 이를 ‘밀폐된 광장’이라고 칭한다.

획일적 진영논리는 대중의 정치적 반감과 무관심을 잉태한다. 일상이 되어버린 진영 간 다툼에 문제의 본질은 유실된다. 사안의 핵심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판단하려고 하지 않고 어느새 정치에 식상해지고 무관심해진다. 비등한 예로 국민적 공분이 일었던 유치원 3법에 대한 입법 지연 사태는 정치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일어나는 의사결정의 굴절된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쯤 되면 답답해지는 건 국민이다. 정치에 대한 혐오로 이어짐은 물론이다.

역사를 반추해보면 제자백가(諸子百家)(1) 자체가 좋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논쟁을 벌이던 공론의 장이었다. 이를 통해 진영의 논리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순자(荀子)는 사람마다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는 의견 분출의 시대에 한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기준이 없다면 그냥 떠벌리는 것과 주장하는 것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한 가지 주장을 가지려면 반드시 그것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사안에 주장하려면 반드시 이치를 갖추어야 한다”(持之有故 言之成理)라고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면 말고’의 무책임한 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그에 따른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 최근 어느 정치인들의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비뚤어진 망언도 그렇다.

우리가 진영의 논리만을 바라보지 않고 주장의 합리성에 주목할 때 열린사회는 성큼 다가온다. 그 사회는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공동의 관점과 일반적 가치를 존중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구닥다리 승자독식의 현 정치체제에 일부의 비타협적 투쟁 유산이 진영 논리를 더 강화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정치적 양극화와 함께 해온 승자독식의 정치체제를 개선하자는 제도 개혁론이 무력해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러나 선거 제도조차 바뀌는 것이 힘겹다. 승자독식 체제의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어느 일방의 진영이 꾸는 꿈이 아닌 다수가 공유하는 꿈을 꿀 수 있는 사회가 제대로 된 시민사회다. 생전 리영희 선생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했다.

■용어설명
제자백가(諸子百家)(1) : 중국 춘추전국시대(BC 8세기∼BC 3세기)에 활약한 학자와 학파의 총칭. '제자(諸子)'란 여러 학자들이라는 뜻이고, '백가(百家)'란 수많은 학파들을 의미한다.

前 노사정위원회 위원
前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現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現 이뉴스투데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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