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뉴스투데이 윤진웅 기자] 영화나 드라마에 늘 등장하지만 정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흔히 '무명배우'로 불린다. 실제 이름은 물론 역할 속 이름 또한 알 수 없다. 단역, 엑스트라, 행인1 등으로 불릴 뿐이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과 닮았다. 복잡한 현대사회 속 구성원 중 하나인 우리는 모두 주연을 꿈꾼다.

무명배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스크린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다. 그 속에서 무명인 자신과 마주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은종건 배우.

성수동의 한 카페에서 은종건 배우를 처음 만난 날. 그는 다부진 체격이 돋보이는 말끔한 정장 차림에 큼직한 서류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곧바로 영화사에 프로필을 제출하러 간다고 했다. 서류가방 안에는 그의 사진과 이력이 나와 있는 문서로 가득했다.

은종건 배우는 1985년생으로 올해 35살이다. 직장인이었다면 과장 정도의 직급을 가질 나이다. 무명배우로 살아가기엔 마주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그럼에도 그의 눈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아닌 확신으로 가득했다. 최근에는 굴지의 대기업으로 불리는 H사의 스카웃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했다.

그는 "꿈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나를 진심으로 응원해주는 지인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작은 결과에도 큰 행복감을 느낀다"며 "남들이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내 사람들과 함께하는 한 나의 꿈을 포기할 일은 없다"고 말한다.

은 배우는 여전히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에게서 배우를 결심한 계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직접 들어봤다.

은종건 배우.

다음은 은종건 배우의 일문일답.

=배우의 꿈을 꾼 것은 언제부터인가.
▲어렸을 때 주목 받는 것을 좋아했다.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기도 하고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대화를 따라 하길 즐겼다. 남들 앞에서 나를 표현하는 것이 행복했고 그런 내 모습을 가족과 친구들이 좋아해 줬다. 고등학교 진학 후 연기학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부모님 몰래 등록했다. 언어와 몸짓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평생 이 일을 하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결심했다.

=외국에서 연기를 배운다는 발상이 특이하다. 보통 국내 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지 않나.
▲대학 입시 준비 과정에서 어머니와 단둘이 미국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뉴욕에 있는 어머니 지인 집을 방문한 뒤 어머니는 다양한 환경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며 나에게 유학을 제안했다. 외국의 교육문화와 예술을 대하는 자유로운 태도에 감탄하셨다. 한국에 돌아와 막무가내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나에게는 도전의 의미가 컸다.

=다른 것도 아닌 연기를 외국에서 배운다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유학 생활은 어땠나.
▲연기를 영어로 배웠기에 언어 문제는 금방 해결됐다.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접할 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언어 장벽보다는 교수와 외국인 학생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어려웠다. 동양인인 나를 굉장히 생소해했다. 친해지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야만 했다. 모아둔 용돈으로 외국인 친구 전부를 한인 식당으로 초대해 밥을 사주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하면 동양인을 멀리한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한 내 태도가 그들을 어색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자신감이 생기고 나서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연기 파트너가 되달라고 부탁하는 친구도 생겼고 기대 이상의 학과 성적도 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각오가 남달랐을 것 같다.
▲남다른 정도가 아니었다.(웃음)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당당하게 오디션과 기획사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외국에서 연기를 배웠다는 이유가 장점이 아닌 단점이 됐다. 한국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계속해서 낙방했고 유학생활보다 더 힘든 한국생활이 시작됐다. 어떻게든 방송계로 진출하기 위해 광고로 눈을 돌렸고 광고 에이젼시 4~5군데를 골라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찾아가 얼굴도장을 찍었다. 3~4개월 끈질기게 찾아가니 광고 기회가 주어졌다. 피자헛 광고를 시작으로 여러 광고에 출연하게 됐다.

=연기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언제인가.
▲광고를 찍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 오디션에 재도전했지만 여전히 벽은 높았다. 오기가 생겨 1년간 모든 오디션에 빠지지 않고 지원했고 오디션이 없는 날에는 영화 현장을 찾았다. 그렇게 영화 '공모자들'과 '역모'에 단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 

은종건 배우.

=무명 생활을 지속하면서 주변의 만류는 없었나. 현실적으로 힘들었을 것 같다.
▲피팅 모델, 영어 과외, 전단지 아르바이트 등 남는 시간에는 일만 했다. 나를 지켜보던 친구들은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면서 1~2년만 더 해보고 취업을 하라고 얘기했다. 가망이 없다는 소리도 들었다.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에는 동의한다.

=그럼에도 대기업 스카웃 제의을 거절했다고 들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하다.
▲H사와 프리미엄 세차 업체 간의 합동 프로젝트에서 계약직 프로모터로 일했다. H사의 차량을 홍보하는 활동이었다. 새로운 형식의 프로모션이다 보니 H사 부사장과 전략담당 부사장이 현장에 방문했다. 당시 전략담당 부사장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직접 의전을 맡아 브리핑을 진행했다. 얼마 뒤 H사에서 나를 경력직으로 채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지만 거절했다. 여태껏 달려온 시간을 헛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물론 아주 살짝 흔들리기는 했다.(웃음)

=대기업 스카웃 제의를 거절한 뒤 주변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사실을 알게 됐지만 크게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많았고 도리어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내가 가진 꿈이 대기업에 취업하는 것보다 높다는 사실을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다.

=친하게 지내는 배우나 연예인이 있나.
▲배우 정해인, 뮤지컬 배우 강홍석과 친하다. 나에게 큰 힘이 되는 친구들이다. 나를 배우로서 인정해주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친하지는 않지만 대학 동문인 연예인도 있다. 가수 에일리다. 카페에서 한 번 인사한 적이 있는데 기억할지는 모르겠다.(웃음)

=정해인, 강홍석과는 어떻게 친분이 생겼나.
▲정해인 배우는 영화 역모에서 만났다. 당시 단역이었던 나와는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고 주인공이기 때문에 선뜻 다가가기도 어려웠다. 현장에서 정해인 배우의 태도를 보고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겸손과 예의가 몸에 밴 사람이다. 우연히 인사할 기회가 생겨 대화를 나눴는데 단역인 내 의견을 끝까지 경청해줬다. 내가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그 뒤로 연기와 관련한 대화를 자주 나눴다. 나의 독특함과 괴짜스러운 열정이 통했나 싶다.(웃음)

강홍석 배우는 운동을 하면서 친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방향이 같아 어울리다 보니 둘이 얘기할 시간이 많았다. 서로의 가치관이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빠른 속도로 가까워졌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나.
▲독립영화를 비롯해 새로운 형식의 공연예술 활동을 시도하려고 준비 중이다. 영화나 드라마 오디션은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꾸준히 지원할 생각이다.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나의 시간이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은종건 배우.

◇ 은종건 배우는= 180cm 74kg의 날렵한 근육질 몸매를 유지하고 있으며 특기는 영어연기와 승마다. 취미로는 헬스, 골프, 요리를 즐긴다. 뉴욕 패이스 대학교 연극연기과를 졸업하고 연극 인간혐오자, R.U.R, Alice in Wonderland 등과 영화 공모자들, 역모, 금의환향 등에 출연했다. 피자헛, SK텔레콤, 파워에이드 등 다수의 광고를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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