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필 전 총리가 지난 4월 18일 신당동 자택에서 자유한국당 이인제 충남지사 후보를 만날 때 모습. [연합뉴스]

[이뉴스투데이 김봉연 기자] '영원한 2인자'로 풍운의 삶을 살아온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향년 92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김 전 총리는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의해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사인은 노환으로 알려졌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5년 서거한 데 이어 이날 김종필 전 총리까지 별세하면서 한국 근대 정치사를 이끌었던 '3金 시대'는 이제 완전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89년 당시 민주당 김영삼 총재(오른쪽), 평민당 김대중 총재(가운데), 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여권의 중간평가 조기강행 대책을 논의하기에 앞서 악수하는 모습. [연합뉴스]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고(故) 김 전 총리는 공주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고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이어 1963년 공화당 창당을 주도하고 그해 치러진 6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5년 6월 당시 일본 외무상인 오히라 마사요시와의 비밀 접촉으로 '김종필·오히라 메모'에 합의해 한일 협정 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 약탈 문화재 반환, 재일동포 지위, 동해어업권, 강제 동원 피해자 보상, 원폭피해자 문제 등 주요 현안은 모조리 무시한 채 경제적 보상과 차관을 대가로 모든 문제의 종결을 선언해버려 이후 한일 관계에 계속되는 문제점과 야당 인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견제와 반대 세력의 움직임으로 한때 공직에서 물러났으나, 이후 삼선개헌과 10월 유신에 협조하면서 다시 정계에 복귀했고 1971년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제11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권의 2인자로 끊임없이 박 전 대통령과 갈등했고, 1975년 12월 18일 국무총리직에서 전격 경질됐다.

김 전 총리가 1973년 제28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손을 흔들며 시민들에게 답례하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와 함께 있는 모습. [연합뉴스]

1979년 10·26사건 후 공화당 총재가 됐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부정축재자로 지목ㄷ돼 재산환수의 수난을 겪었다. 1987년 공화당을 재건해 총재가 되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며, 1990년 노태우·김영삼과 '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을 창당해 최고위원이 됐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으며, 민자당 대표위원을 지내던 중 1995년 2월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됐다.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후보 단일화를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 당선에 일조했으며,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8년에 두 번째로 국무총리가 됐다.

고 김 전 총리의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졌으며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발인은 27일이며 장지는 충남 부여군 외산면의 가족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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