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들은…근거 없는 주장이나 변명으로 디테일(detail)의 늪에 빠지게 하여…”

어제 특검이 배포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결심 공판 논고문을 읽다가 이 부분이 눈에 밟혔다. ‘디테일의 늪’이라는 표현이 못내 찜찜했다. 굳이 이런 표현을 쓴 속내는 무엇일까.

이리저리 유추해 본 끝에 도달한 가설은 ‘특검도 수사 결과의 디테일에 허점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특검은 “우리의 수사에 비록 허점은 있지만 재판부는 그 허점에 눈을 돌리지 말고 우리가 제시한 큰 그림, 즉 정경유착 프레임에 집중해 달라”고 당부하려 했던 게 아닐까.

그런데 진짜 이런 생각이라면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서양 속담처럼 디테일의 결함이 치명적 오류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법적 분쟁과 관련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지난 2002년 캐나다에서 벌어진 ‘백만 불짜리 콤마’ 소송이 좋은 예다. 케이블방송사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이 통신사 벨 알리안트와의 전신주 임대 계약서에 콤마 하나를 잘못 찍었다가 100만 달러를 날린 사건이다.

디테일의 중요성은 인신을 구속하는 형사 재판에서는 더욱 강조돼야 마땅하다. 지난 2006년에 있었던 ‘현대차 부채 탕감 로비 사건’은 이에 대한 교훈을 준다. 그해 6월 대검 중수부(당시 중수부장이 지금의 박영수 특검이다)는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국장을 구속 기소했다. “현대차의 의뢰로 변 전 국장에게 2억 원을 건넸다”는 김동훈 전 안건회계법인 대표의 진술이 근거였다.

그러나 재판이 진행되면서 김 전 대표의 진술은 신뢰성을 잃었다. 결정적인 반대증거는 변 국장의 PDA단말기에 저장된 그의 일정표였다. 김 전 대표가 사무실로 찾아가 돈을 건넸다는 날짜에 변 국장은 다른 약속이 있었던 것. 재판 관계자들 사이에선 물증은 아니지만 또 다른 심증도 거론됐다. 법원에서 피고인과 마주친 김 전 대표가 낯선 인물을 대하듯 멀뚱멀뚱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뇌물을 주고받은 사이라면 나올 수 없는 반응이었다.

결국 1심 재판부(재판장 이종석)는 2007년 1월 김 전 대표의 진술을 탄핵하고 변 국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김 씨가 뇌물을 줬다는 날짜에 변 씨는 국회에 참석했거나 변 씨 PDA에 다른 약속들이 있어 김 씨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에 검찰은 즉각 항소했다. 채동욱 당시 대검 수사기획관은 “변 씨의 유죄 판결은 확실하다고 생각했다”며 “거짓 알리바이를 댄 변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이 사건을 대법원까지 끌고 갔지만 2009년 9월 무죄로 확정 판결됐다. 사건이 종결된 후 무고하게 144일간 옥고를 치른 변 전 국장에게 정부가 건넨 형사보상금은 4380만원이었다.

이처럼 형사 재판에서 증거나 증언의 디테일은 결코 간과할 부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재용 부회장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디테일은 어떤 부분일까. 현재 이 사건에서 물적 증거로는 ‘금융지주회사, 은산분리’등의 단어가 적힌 안종범 전 수석의 수첩, 박 전 대통령이 기업인들을 만날 때 참고했다는 청와대 말씀자료 등이 제출돼 있다. 그러나 안 전 수석의 수첩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부정한 청탁’이 오갔다는 직접증거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독대의 정황증거로만 채택된 상태다.

특검이 마지막 공방기일 때 애초 공소장에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 3차 독대 당시 영재센터 사업 계획안을 담은 봉투를 직접 전달했다’고 기재했던 부분을 수정한 것 역시 주목된다. 변호인 측은 그동안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계획안이 담긴 봉투를 직접 받기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이에 특검은 변경된 공소장에서 두 사람의 3차 독대 시점을 수정했다. 또 직접 전달했다는 문장에서 ‘직접’이란 글귀도 없앴다. 이 같은 차이점은 비록 미세한 것이지만 그 디테일이 사건의 전체 윤곽을 다르게 그려낼 수도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가 디테일을 ‘늪’으로 치부할지, ‘악마가 숨어 있는 곳’으로 여길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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