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잘 모른다. 가뭇한 기억이지만 진보진영의 토론회에서 한차례 마주했을 뿐이다. 간혹 방송에서 날 선 시각으로 세상을 평가하는 그를 호기심으로 바라본 정도였다. 당연지사 그의 언행은 내게 데면데면했다. 그런 그가 작금의 조국 사태에 대해 ‘윤리적으로 패닉 상태’라고 고백했다. 조국 사태는 공정성과 정의의 문제이지 결코 이념이나 진영으로 나뉘어 벌일 논쟁 문제가 아니다”라고도 했다. “조국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진보’와 ‘보수’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라고도 했다. 거두어들였지만 진보 정당의 탈당계를 내기도 했다.
멀쩡하게 세상을 살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든 암은 참으로 불편한 손님이었다. 가뜩이나 비좁은 일상을 비집고 들어선 모진 병은 그 행간도 불온하지만 존재를 아득한 암전에 가둬놓는다. 3년 전 내 경우가 그러했다. 아프기 전과 후의 삶의 풍경은 마치 긴 터널, 안과 밖의 명암 차이만큼 갈라져 있었다. 언젠가 어느 글에서 존재에 대한 온전한 성찰의 시간을 허락해 주는 게 통증이라 썼지만 큰 병 앞에서 그런 내공을 보이기가 쉬운 일은 아닐 터이다. 누구나 가늠하기 힘들었던 죽음이란 것이 간결해진 병마의 무게로 다가서면 일상은 무겁고 서
설 명절에 고향에서 만난 친구는 분기탱천했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며 대척점에 서있는 정당에 대한 그의 신랄한 비판은 날이 서있었다. 비판의 대상이 된 논거들은 가늠하긴 어렵지만 보편적 상식선에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듯했다. 그러나 뭐라 반론을 제시하기엔 명절이 주는 너그러움에 반하는 터라 경청을 감내해야 했다. 오랜만의 술자리는 불편했고 당혹스러웠다. 그의 비판의 기저에 사실 확인은 요원했고 왜 그 정당을 비난하는지 논리는 부실했으며 허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친구가 태어나고 거주하는 지역이, 지지하는 정당이 주류를 이루
틀림없는 사실 하나, 좋은 국가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도 먹고사는 나라이다. 한국 사회가 이 불변의 국가 존립 명제를 자영업 시장에 적용해본 적은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내키지 않은데도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뛰어드는 게 이 땅의 자영업이기 때문이다. “나 경찰 아니고 치킨 집 아저씨다. 소상공인들이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고”, 요즘 극장가 예매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영화 ‘극한 직업’의 배우 류승룡의 영화 속 대사이다. 최근 20년 넘게 다니던 직장에서 떠밀리듯 명퇴를 한 오랜 친구도 그렇다. 대
최근 일부 대형교회 민낯에 대해 쓴 글의 애프터서비스라고 해두자.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공익적 교회 역할이 매우 중차대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기대여서이다.최근 한국 개신교는 볼썽사나운 교회 부자세습 논란 이후 시민사회로부터 집중적 성토를 받고 있다. 이로 인해 개신교 내부에서 대안교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모색을 시도하고 있고, 그 대응 모델로 ‘작은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작은 교회 목회자의 생계문제를 둘러싼 대형교회,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칠
바둑 좀 두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갈라치기’란 용어가 있다. 바둑판의 포석 단계에서 변의 상대방 세력권, 중간을 가르는 것을 의미한다. 변의 중간 요처에 한 수를 두어 상대 세력을 두 갈래로 나눔으로써 그 세력의 확장을 억제하는 유효한 수이다. 나아가 자신의 상하, 또는 좌우로 두 칸 벌릴 여유를 맞보기로 하여 우세의 근거를 마련하는 기본적이고도 고차원적인 기술이다. 이러한 갈라치기가 요즘 정치권에서 흔하게 목도된다. 그 행간은 정치적 이득이 목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바둑 기술인 갈라치기가 정치에서 변종 될 때 정적을 교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노동자인 24살 청년 김용균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 2016년 5월, 서울 구의역에서 19세 김군이 홀로 승강장 안전문을 고치다 기차와 안전문 사이에 끼여 사망한지 2년 반이 지나 또다시 벌어진 참사다. 청년 김용균은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전기 노동자였지만 세상 가장 어두운 곳에서 떠났다. 아무리 사고가 나도 원청이 책임지지 않는 이상 이 같은 사고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침묵은 길었다. 어둠도 길었다.지난 11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민
묵은 습관처럼 일주일에 한 번은 공중목욕탕을 찾게 된다. 세상사, 가장 솔직한 모습으로 뜨거운 탕에 앉아있다 보면 이내 몸도 마음도 무장해제가 된다. 동행한 친구와 나누고 싶던 말들은 따뜻한 온탕의 열기와 섞여 적당한 온도로 서로에게 전달된다. 관계의 공감에 있어서는 군더더기 없는 태도의 대화가 있기에 참으로 유효한 공중목욕탕이다.공중목욕탕의 역사는 유구하다. 목욕 문화의 전성기는 고대 그리스지만 만개한 시기는 고대 로마이다. 요즘에야 먹거리 놀 거리 가득한 찜질방이 천지지만 목욕탕을 놀이공간으로 발전시킨 것은 고대 로마인들이 시초
재산을 물려주는 상속과는 엄연히 다른 세습은 주로 신분을 대물림한다. 타인의 권리나 의무 등을 이어받는 승계와도 구분되는 개념이다. 권리의 객관화가 전제되는 승계와 달리 세습은 매우 가족 친화적이며 탐욕적이다. 근래 들어 어감도 불온해졌다. 고용세습 의혹은 일부 한국 대형교회 세습 문제와도 잇닿아 있다.직설하자면 지금 논란들은 세습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습이 실행되기 전에 이미 권한을 이권으로 치환하는 문제와 이러한 이권을 세습 당사자가 자녀에게 사유화하고 있다는 데 고용세습의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부 노조가 될
20년 넘게 다니던 대기업을 홀연히 그만둔 후배를 만났다. 가장으로서 생계 의무를 다하기 위한 힘줄 같던 직장이었다. 대학원 졸업 후 선생의 꿈을 접고 느닷없는 결혼을 한 그였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늘 작심했지만 결행하기까지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으리라. 아직 대학에 다니는 딸과 올해 수능을 앞둔 딸이 있음에도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조직 내 관계에 치여 사느니 한 번이라도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다. 못다 한 공부를 끝내고도 싶어 했다. 가슴은 이해되나 호구지책에 쉽지 않은 결기였을 것